왜 실패하는가 #3
1989년 4월부터 현재까지 방영되고 있는 ‘와타나베 아츠시의 건물 탐방(渡辺篤史の建もの探訪-일본 아사히 TV)’은 집을 소개하는 일본의 장수 프로그램이다.
건축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집에 관련하여서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에게 이 프로그램은 어떤 의미였을지 궁금하다. 배우 겸 방송 내레이터였던 그는 회를 거듭하면서 집을 보는 안목이 더해졌고, 그를 30년간 한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건축디자인과 객원 교수를 지낼 만큼의 능력까지 부여하였다.
첫방영이 시작되었을때 그의 나이 42세 였고, 그리고 지금은 71세로 노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세월만큼이나 노련함과 집을 보는 세련된 안목까지 두루 갖추었다.
이토록 인상좋은 와타나베 아저씨는 항상 이렇게 질문을 한다.
중요한 질문이다.
주방의 싱크, 거실의 넓은 창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의 작은 소품까지도, 건축주에게 「이렇게 하기 위해서 건축가에게 무엇을 요구하였는가」를 심각한 표정으로 때로는 미소를 머금고 물어본다.
와타나베 아저씨는 30년 가까이 이렇게 질문을 하였다.
건축주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당시의 요구사항을 샅샅이 쏟아놓는다. 이런 저런 요구에 건축가는 이렇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건축주는 지금의 결과물에 만족하고 와타나베는 한껏 고취되어 감탄사를 연발한다. 와타나베 아저씨의 조금은 과장된 듯한 반복된 감탄사도 듣고 있자면 정감이 넘치고 듣다보면 빠져든다.
최근에 국내에도 비슷한 포맷의 방송이 여럿 있다.
방송을 보면 비슷하게 여쭤본다. 「왜 이렇게 하셨는가?」건축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설명을 이어간다. 마치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로 이 집이 이렇게 훌륭하게 만들어진 듯 이야기는 이어진다.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질문도 다르고 답변도 다르다.
전자의 경우 건축가의 작업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후자의 경우는 건축가의 존재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단정하자면 전자는 옳고 후자는 틀리다. 건축가를 단순히 공사를 위한 도면작성자로 밖에 인식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일맥하는 표현이다. 일본 프로그램의 경우 집을 설계한 건축가는 정작 프로그램에 나타나지도 않지만 건축가의 존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집에 있어 건축가의 존재는 중요하다. 건축가의 존재가 희석된다면 프로그램은 그냥 평당 얼마를 운운하는 단순한 부동산 소개와 다를게 없다.
건축주의 요구사항, 그리고 질문은 중요하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질문과 요구사항에 대해 건축적으로 가능한 해석과 구법, 아이디어, 해결방법 등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그 가지수가 하나 일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다. 그 중 건축주는 자신에게 적합한 방법을 찾아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끊임없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들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잊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질문을 통해 정보를 획득하여야 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곧 집이 된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다면 서로의 방은 체감상 멀어져야 할 것이고, 친구가 좋다면 그들이 가끔 머무를 방이 필요할 수도 있고, 아이들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그 방은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하고, 방의 천장고가 달라질 것이다. 거대한 주방과 그에 따른 식당이 필요하다면 요구하여야 한다. 수많은 신발들과 잡동사니를 보관할 창고가 특별히 필요하다면 스스럼없이 다른 공간을 버리고 필요한 공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요구하여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하지만 내가 요구한 것들을 위해서 얼마나 큰방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