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비저블 게스트 (2016)'
우리는 각자 영화를 고를 때 기준이 있다. 크게는 영화의 장르나 평점이 될 수 있지만, 작게는 선호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장 큰 기준 중 하나가 영화가 나온 '국가'인 사람을 본 적 있는가? 사실 나는 외국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 취향을 아는 친구들은 '디워도 울어가며 본 진정한 애국자'라며 나를 놀리지만,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외국인의 이름은 너무 낯설고 어렵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의 미묘한 어투나 관용구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외국 영화는 참 피곤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인비저블 게스트'를 결제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영화가 스페인 영화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뻔한 할리우드 영화겠거니, 한 것이다.
영화를 재생한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15년 넘게 영어를 배웠으면서 그 흔한 영어 단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느 나라 영화인지 추측도 할 수 없었다. 지금껏 스페인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처음엔 그저 당황스러웠다. 변호사 '버지니아'가 자신을 선임한 '아드리안'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평범한 자막과 달리 서로 쏘아대듯 말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사투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감이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처음엔 어색해서 귀에 거슬리던 묘한 스페인 어감이 점점 매력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정점을 찍은 장면은 버지니아가 아드리안에게 조언하며 "고통 없는 구원은 없고, 당신은 나보다 똑똑하지 않아요."라는 명대사를 남길 때였다. 이 대사는 내가 어떻게 읽어도 절대 포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존댓말로 끝나는 대사를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나라 배우가 있을까? 물론 버지니아를 연기한 '안나 와게너'라는 배우의 연기력도 한몫하지만, 나는 스페인 어감이 살린 대사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쏘아대듯 말하는 스페인 어감이 아니면 미적지근한 반쪽짜리 대사였을 게 분명하다.
'인비저블 게스트'를 통하여 알게 된 낯선 나라의 영화를 보는 재미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 나는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빅데이터와 4차 산업혁명으로 TMI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정보로 배우를 기억한다. 요즘 충무로에서 소처럼 일하는 배우 이경영을 볼 때 다른 영화에서의 캐릭터가 연상되어 몰입을 방해하는 순간을 예로 들 수 있다. 국내 영화를 즐겨보는 나에게 이러한 현상은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소인데, 낯선 나라의 영화를 감상할 때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드리안을 연기하는 저 배우가 '스페인의 정우성' 혹은 '스페인의 박보검'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눈엔 그저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 못된 남자 주인공이라는 사실만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낯선 나라의 영화를 보는 것은 나를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순수한 아이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인비저블 게스트'를 본 나는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고를 때 영화가 나온 국가를 살펴본다. 외국 영화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나온 영화인지 확인하고 보기 위해서다. 대만이나 일본처럼 그 나라의 영화만이 주는 고유한 영상미나 느낌이 있듯이 귀로 듣는 그 나라의 말과 언어, 그리고 생소한 배우들까지 영화를 빛내는 요소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면에서까지 참 예술적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기 전 뒤통수를 5분 동안 후려갈김을 당했지만, 이 영화를 스토리나 반전, 촬영 기법 등 다른 차원에서 칭찬하지 않았다. 까다롭지 않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 매끄러웠고, 그 이상으로 낯선 '스페인 영화'라는 점에서 깨달은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스페인 영화라서 좋았던 '인비저블 게스트'는 2017년, 우리나라 개봉과 동시에 이미 국내 리메이크가 확정된 상태였다. 영화 제목이 '보이지 않는 손님'으로 바꾸어 개봉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는 예측할 수 있다. "고통 없는 구원은 없고, 당신은 나보다 똑똑하지 않아요."라는 명대사를 그 어떠한 선입견도 없는 배우가 스페인 어감보다 더 짜릿하게 읽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