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로 창의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가끔씩 나에게 창의적이라고 한다. 내가 발휘하는 창의성은 대부분 다른 데서 보고 들은 것들이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창의력보다 응용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다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것을 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둥, 피카소도 처음에는 사실주의 데셍부터 시작했다는 둥 하는 말에는 일정한 진실이 담겨 있다.
어제 한문 시간이었다. ‘얻을 득’ 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예지랑 동재가 신나게 웃는 게 보였다. 예지한테 물었다.
“왜 웃나?”
“웃을 수도 있죠.”
준하가 그 말을 듣고
“우와, 저 말버릇 좀 봐라.” 하며 비난하더니 나를 보며 덧붙였다.
“선생님, 요새 왜 이렇게 말이 딸려요? 저번에 백경민한테 말싸움 지고 나서 자신감을 잃으신 거 아니에요?”
나도 지지 않고 똑같이
“왜 웃는지 물어볼 수도 있지.” 했더니
“그냥 재밌어서 웃었어요.” 하는 들으나마나 한 대답이 돌아왔다.
본문은 책을 빌려 가서 읽지도 않고 돌려주면 다시 주면서 반드시 읽게 만드는 ‘동춘당 송선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제집 사서 앞쪽만 까맣게 풀고 뒤쪽은 안 풀어서 하얗게 남겨지는 경우를 예로 들며 연희에게 물었다.
“그럴 때 뒤쪽도 ‘반드시 풀게 만드는’ 동춘당 송선생 같은 사람이 있나?”
“엄마요.”
“엄마가 남은 부분 풀라고 강요하면 푸나?”
“예.”
나는 예지 말을 흉내 내어 말했다.
“왜 풀어? 엄마한테 ‘안 풀 수도 있죠.’ 이렇게 말하면 되지?”
다른 분단에서 누군가가, 다 들리게 말했다.
“와, 쌤 뒤끝 장난 아니다.”
나는 말에 민감하기 때문에 작품 속의 대사, 문장이나 남의 말을 잘 따라한다. 원작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재미있는 패러디로 받아들이고,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창의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니 일석이조이다. 물론 원작을 알고 들을 때가 훨씬 재미있다.
요산 김정한이 지은 ‘수라도’의 배경을 찾아 문학기행을 갔을 때, 미륵당의 모델이 된 용화사 법당에서 강사님이 ‘수라도’의 첫 머리를 읽어 준 적이 있다.
“와 그라노, 우리 부체새끼를……”
보살 할매들이 어린 분이를 놀릴 때 분이의 할머니 가야부인이 한 말이다.
그런데 강사님이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 있을 때 함께 온 선생님 집의 아이가 법당 안을 뛰면서 장난을 쳤다. 다른 선생님 한 분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내가 말했다.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우리 부체새낀데…”
수라도의 첫 문장을 모르고 들으면 도대체 내가 무슨 뜬금없는 헛소리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2005년도에 수학여행가는 버스 안에서 구민정이랑 안경진이 나한테 “선생님이 말 하는 건 무슨 소설 대사 같아요.”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