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같은 학교 선생님이 손금을 봐주었는데 ‘관운’이 있다고 하더라면서 내 손을 보자고 하였다. 이게 재물선인데 의외로 길다는 둥, 이게 학문선인데 공부도 오래 한 애가 왜 자기보다 선이 짧냐는 둥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게 생명선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 내 생명선은 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선이 아니고, 짧은 선들이 몇 가닥 끊어질 듯 이어져 있었다.
나는 “와 나는 생명선이 짧구나. 빨리 죽겠는데.” 라고 웃으며 말하였다.
친구는 1초간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망설임을 극복하고 단호하게
”그래도 짧은 것들이 계속 이어져 있으니까 일찍 죽지는 않을 거야.” 라며 위로의 말을 하였다.
순간, 나는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위로의 말을 건네기 직전, 그 1초의 망설임이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그건 내가 고등학교 축제 때 느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망설임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 나는 ‘고전경서 반’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였다. 활동이라 해 봐야 학교 축제에서 고전경서 반에서 전시할 내용과 손님들이 체험할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축제 날에는 학교의 모든 동아리가 각자 한 교실을 맡아서 꾸미고 호객 행위를 한다. 그 날은 다른 고등학교의 학생들도 온다. 심지어 여학생도 온다. 잘 되면 거기서 만난 여학생과 발전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여고생들은 꽃다발을 사와서 마음에 드는 남학생에게 주기도 하였다. 남자 투성이 고등학교에 여고생! 각 동아리반은 한 명의 여자 손님이라도 더 모시기 위해 축제 준비에 사활을 건다.
그러나 우리는 고전경서 반. 고전경서란 무엇인가.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서경, 역경… 고등학교 축제에서 여학생들이 이딴 걸 배우러 올 리 없다. 고리타분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노자, 장자, 열자를 추가해 보아도 마찬가지. 선배들은 비장의 무기로 ‘손금’과 ‘사주 풀이’를 준비했다. 손금을 준비한 선배들은 심지어 여학생과 손도 잡아 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손금’과 ‘사주 팔자’를 믿지 않는다. 그 이론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미래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때그때 달라지면서도 미래를 약간 예측하게 하는 ‘측자’를 준비했다.
’측자’의 기본은 이렇다. 내가 앉아 있고 뒷벽에 여러 가지 한자를 써 둔다. 손님이 오면 어떤 상황을 생각하면서 한자를 하나 고르게 한다. 그 한자를 보고 내가 운세를 풀이해 준다. 이때는 여러가지 ‘파자법’을 활용한다. 예를 들어, 南(남녘 남)을 고른다. 단순히 그것을 ‘남쪽으로 가면 길하다’로 풀어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떨 때는 ‘운세가 불행하다’로 풀이해 준다. 南의 모양을 잘 보면 幸(다행 행)의 위에서 두번째 가로획을 옆으로 길게 늘여서 아래로 꺾은 모양과 같다. 그러니 南자를 고른 사람은 행복이 쭉 뻗어나갈 것 같지만 뚝 꺾인다는 뜻이 된다.
호기심에 찬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한자를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랑 헤어진다, 재수가 없다, 이런 안 좋은 점괘가 나와도 아무 거리낌 없이 풀이에 따라 막 말했다. 나는 점괘를 그대로 말해 줄뿐이고, 어차피 듣는 사람도 진지하게 들을 리가 없기 때문에 상처를 준다는 의식도 없었다. 손님들의 반응도 꽤 좋았다. 방명록에는 ‘재밌네요, 신선해요, 엄마가 철학관에서 본 거랑 점괘가 똑같아요, 팔다리가 부러진다니 막말하지 마세요’ 이런 글들이 쌓여 갔다.
그러던 중 어떤 차분하게 보이는 여학생이 와서 圈(우리 권)자를 골랐다. 원래 圈은 ‘우리 권’이기 때문에 짐승이 우리에 갇힌 것처럼 ‘병에 갇혀 못 빠져나오고 결국 그 병 때문에 죽는다’로 풀이한다. 글자 풀이해 주는 게 재미있고 반응도 좋아서 들떠 있던 나는 아무 생각없이 웃으며 질문을 하였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죠?”
”네, 할아버지가 편찮으세요.”
’그 병 절대 안 나아요.’라고 말하려던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재미로 보는 운세라도 할아버지가 편찮으신데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냥 풀이대로 말해 버릴까? 아니면 그냥 좋은 말로 위로해서 보낼까? 그런데 분명 그 병은 낫지 않을 거야. 병이 낫는다고 운세를 봐줬는데 안 나았다면 나를 돌팔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잘난 것을 증명하려고 남에게 상처를 줘도 될까?’
짧지만 격렬한 망설임 끝에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풀이로 여학생을 위로해서 보냈다.
”圈의 테두리 안에 있는 卷(문서 권) 보이시죠? 할아버지의 병은 책 속에 답이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치료법에 관한 책을 많이 찾아 읽으시면 나을 거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손금의 생명선을 본 친구도
’배운 대로라면 이 생명선은 정말 불길하군. 그렇지만 굳이 있는 그대로 말해서 친구에게 상처주고 싶지는 않아.’
라는 고민을 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등학생 때의 나처럼 1초 동안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처럼 ‘상처를 주는 진실’ 대신 ‘따뜻한 위로’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지난 5월에 ‘우아한 거짓말(김려령 저)’로 독서 토론 수업을 하였다. 토론 주제 중 하나는 ‘상처를 주는 진실보다 선의의 거짓말이 낫다’였다. 아이들은 찬성, 반대로 나뉘어서 격렬한 토론을 하였다. 나 자신도 결론을 못 내리는 주제에 대해 억지로 하나의 입장을 정해서 그것을 옹호하는 토론을 하게 만드는 나도 참 무책임한 교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