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시간이었다. 이번 단원은 정조가 쓴 글을 배운다. 정조대왕이 말하기를,
”天下無無一能之人(천하무무일능지인)이니 若聚十百人而各用其長(약취십백인이각용기장)이면 便爲通才(변위통재)리니 如此則世無棄人(여차즉세무기인)하고 人無棄才矣(인무기재의)리라.”하였다.
천하에 한 가지 능력도 없는 사람은 없으니 만약 열 또는 백명이 모여 각각 그 장점을 쓰면 곧 재주들이 통하리니 이와 같다면 세상에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사람들은 재주를 버리지 않으리라. 지금 듣기에는 너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능력은 뛰어나나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세상에 버림받는 이들이 많았던 조선 시대를 생각하면 개혁군주인 정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또한 ‘인무기재’에서 보듯이, ‘일능 가지고 뭘 하겠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낸 통찰력이 놀랍다. 계명구도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굳이 이런 역사적인 부분을 끌고 오지 않아도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일능(一能)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요? 네가 가진 일능은 뭐지? 너는 몇 능을 가지고 있나? 세상에 어떤 사람은 10능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100능을 가지기도 합니다. 만 개의 능을 가진 사람은 어떨까요? 만능지인이 되겠죠? 천능이나 만능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내가 뛰어나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사회를 이끌어 가면 1능이나 10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재주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재주를 펼칠 생각도 못하고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재주가 1능밖에 안 되니까, 하면서 스스로를 못나게 여기고 뛰어난 누군가가 이끌어주기만 기다리면서 자포자기할 때가 있겠죠? 그렇지만 1능을 가진 사람이 만 명 모이면 만능을 가진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그렇게 재주들을 통하게 해 주어야 버려지는 사람도 없고, 사람들이 자신의 재주를 버리는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아이가 말했다.
”이렇게 짧은 글을 읽고 그렇게 길게 설명할 수 있다니 대단하네요.”
그러자 다른 분단의 아이가 받았다.
”저렇게 긴 설명을 이렇게 짧은 글로 표현해 놓은 정조가 대단한 거 아냐?”
함축적인 표현을 ‘해석’하는 능력과, 생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에 대해 스스로 깨닫고 생각을 서로 나누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번 3학년들은 1학년 때부터 보아 온 터라 특히 애정이 많이 가는데, 조금씩 생각이 커져 가는 것이 보일 때마다 신기하다.
저번에는 애들이랑 잡담하면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가득 찬 2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기사가 앞문을 열더니 태워주지는 않고,
”뒷차 3분 뒤에 오니까 뒷차 타세요.”
하더니 가버렸다. 가끔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애들 중에 한 명이 날 보더니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로 다음 버스가 3분 뒤에 오겠느냐는 뜻이다. 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해진 내용보다 말해진 방식을 더 주의해서 보게 하려고 확신에 차 있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과연 그럴까?” 하고 묻는다. 이제는 아이들이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지만 ‘말투’만 따라하는 건 아닌지 의심되고 걱정될 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조급해진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쳐서 졸업시키고 싶은데 국어 시간은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은 1분 1초도 아깝다. 이번 기회에 “짧은 글을 읽고 길게 해설하는 능력”도 가르쳐주고 싶은데 어디 끼워넣을 단원이 없다.
이것들은, 한문 선생님이 아닌, 국어 선생님으로서의 생각들이다. 다시 한문 선생님의 페르소나를 쓰고 보자면, 본문의 맨 첫 부분 ‘천하무무일능지인’은 주자어류의 “天下無無性之物 – 천하에 성(性)을 안 가진 것은 없다.”를 오마쥬한 것 같다. 물론 이 때의 성(性)은 남성, 여성이 아니라 ‘성리학’의 성(性)이며, 그것은 중용 제1장의 “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에 나온 그대로이다.
하늘의 명령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이른다. 교(敎)란 가르침이며, 가르침은 천명으로 부터 나온다. 공자님이 오십 세에 천명을 알았다는데, 내 교육의 결과는 이 아이들이 오십 살이 되어야 나타나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나부터가 천명이 뭔지도 모른 채로 교(敎)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럴 때는 다만 내게서 배운 이들이 보내주는 말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위로를 얻는 수밖에 없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에게 공부에 흥미를 불어 넣어주신 분이에요 ㅎㅎ”라는 민소님의 문자, “한 학기 정말 감사드렸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앞자리에서 앉아서 결석 안 하고 들은 수업 진짜 딱 두 개 있는데 그 중 한 개가 교수님 수업이에요 ㅋㅋ”라는 ㅅㅇㄱ님의 카톡 같은 것들은 힘들 때마다 다시 읽으면서 각오를 다지게 해 준다. 내가 다른 어떤 선물도 거절하지만 편지만은 감사히 받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나에게 두고두고 위로를 준다는 점이 편지들이 가진 ‘글의 힘’이기도 하다. 정조 이산이 쓴 글도 글의 힘을 가져, 이 단원을 배운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위로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