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토우치 트리엔날레 025 가을] 퇴사 여행 (0)

Prologue 갑작스러운 퇴사

by nkjh


추석 연휴전날 퇴근 직전 시간에 AI 센터 대상으로 조직개편 예고 메일이 왔다. 매년 있는 조직개편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AI 조직 축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타부서 이동 기회 오픈하니 빨리 옮기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연휴 끝나고 월화 출근해서 바쁘게 업무 처리를 하고 수요일 학회 참석차 출장나와 있는데 회사 공지 문자가 왔다. AI 조직 대상으로 일주일간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머리가 멍해진다. 갑자기? 그것도 이렇게 급하게 정하라고? 일단 넘기고 학회 발표내용에 집중해본다. 저녁 만찬에서 회사 밖 사람들과 어울리며 잠시 고민을 미뤄뒀다.

다음 날 또 다른 메일. 신청자가 목표를 넘을 경우 선착순으로 자를 수 있다는 내용. 과연? 신청 기간동안 취소 가능하다고 하니 들어가 퇴직 지원금 확인을 눌러 일단 신청.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님에도 순간 해방감이 몰려온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 이 다음 학회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목돈이 들어온다지만 퇴직지원금은 IRP 또는 연금 저축 계좌로 들어오고 최대한 많은 금액을 연금으로 받아야 세금을 조금 (30%~40% 감면) 이라도 덜낸다.

생활비보다 막막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직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독립할 수 있을까? 이렇게 빨리 원치 않은 은퇴를 하게 되면 무엇을 하며 살지?

막연한 두려움에도 자문해보았다. 지금 회사에 남아서 내가 얻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간 누리던 경제적 여유, 업무지원 시스템, 복지 혜택들, 쾌적한 업무환경과 실력있고 품성 바른 동료들…

하지만 AI 조직 슬림화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앞으로 더더욱 회사내에서 내가 하고 싶은 내용의 개발업무를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주말을 보내며 결정을 굳혔다.

그리고 신청 기간 종료 다음날 퇴사가 확정되었다. 다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단 7일 근무 기간동안 14년 넘게 다닌 회사를 정리해야한다. 외부업체, 기관들과 협업하는 과제들은 소속 조직이 바뀌어도 지원부서와의 연결만으로 자체적으로 진행해서 종료할 수 있도록 하고 후속 과제를 하기 어려운 과제는 정리한다. 이직할 소속기관없이 퇴사하게 되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생각치 못한 문제들이 있었다. 의료보험 지역 가입으로 전환, 연금 납입 여부선택, 사내 담보대출금 상환, 여기까지는 바로 알고 있었던 내용. 그런데 예약잡혀있던 병원 진료비는 어쩌지? 단체 실비가입되어 있으니 필요없다 생각해서 가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퇴사하고 바로 실손 의료보험 가입해도 혜택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예약날짜를 당겨서 치료비 전액 회사에서 지원 받았다. 실손을 미리 가입해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당장 퇴사 직후에 잡혀있는 외부 모임이 있는데 제시할 명함이 사라진다. 먼저 퇴사하고 자립한 친구가 퇴사하면 가장 먼저 개인명함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이유였다. 명함주문 기준이 최소 200장 단위다. 대충 만들기도 부담스러운 갯수. 퇴사 준비로 정신없는 와중에 명함 디자인 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 짐을 챙기고 퇴직 인사 메일을 보냈다.

노트북을 반납하고 나니 회사를 떠나는 게 조금 실감하며 마지막 업무시간을 등록한다.

핸드폰 메모리가 부족하다는 메세지에 회사 앱을 가장 먼지 지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느 회사 소속도 아닌 개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