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마음먹은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내가 계획한 대로 나의 인생이 평탄하게 진행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임신을 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나의 이런 자신감이 얼마나 짧고 좁은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인지 깨달았다.
우선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빠르게 근력이 손실되고 먹는 양이 특별히 늘어난 것도 아닌데 만삭까지 체중계의 앞자리 수는 두 번이나 바뀌었다. 늘어난 체중만큼 손과 발은 퉁퉁 부어서 10mm 더 큰 사이즈의 신발을 사야 했다. 잠을 자다가 몸이라도 좀 뻗을라치면 어김없이 쥐가 나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대중교통도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없었다.
하루는 비 오는 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사람이 평소보다 많아 버스 안은 몹시 붐볐다. 앉을자리는커녕 비좁은 통로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서 있었는데 습한 날씨에 많은 사람들로 인해 눅눅해진 공기 속에 한동안 있다 보니 갑자기 하늘이 핑 돌았다.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고 눈 앞이 깜깜해져 당장 하차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서 있으니 울렁거린 속은 진정됐지만 다시 버스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택시를 잡아탔으나 길은 막혔고 결국 지각을 한 나는 죄송하다는 말 외에 구구절절 사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버스나 전철 안에서 어지럼증과 울렁거림은 종종 찾아왔고 덩달아 지각하는 날도 늘었다.
강의를 하거나 교육을 진행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오랜 시간 서 있기 힘든 것은 당연했고 말이 좀 길어지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렇다고 앉아서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 서면 나의 말이 아닌 나의 배로 관심이 집중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한 번은 임신 중기에 연수원에서 하는 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두 시간 정도 교육 오프닝 강의를 하고 쉬는 시간에 의자에 잠깐 앉아있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직원 한 명이 와서 달달한 꿀물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교육 진행은 좀 쉬게 해 주면 좋을 텐데 힘들겠어요..."
그 말을 듣고 순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무리 임신을 했더라도 업무에 예외는 없었다. 업무의 예외는 곧 평가등급의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고 나 또한 그것은 원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꽉 찬 대리 직급으로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회사의 과장 승진율은 30% 정도로 승진을 위해서는 당연히 한 해 동안 '과장' 직급에 걸맞은 성과를 보여줘야만 했고 승진을 앞둔 직원에게 큰 프로젝트나 기획 일을 우선적으로 몰아주는 것이 팀 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하게 될 직원에게 업무 인수인계 리스트를 작성하라고 하지 소위 '큰 업무'는 주어지지 않았다.
승진이란 과거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앞으로의 성과에 대한 약속이다.
지난 몇 해 동안 어떤 성과를 냈더라도 이 사람이 조만간 떠날 사람이라는 가능성이 보이면 승진에서는 열외가 된다. 승진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직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승진 기회를 박탈한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즉, 승진이란 '앞으로 이 회사에서 계속해서 충성심을 발휘하라'는 회사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산부는 승진의 기회에서 멀어진다. 출산 이후 복직 가능성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고, 복직 이후에는 육아라는 책임이 하나 더 어깨에 얹어지므로 회사 생활에 이전처럼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다.
결국 승진 발표가 있던 날 나는 퇴근 시간이 지난 후 한 시간 동안 '엄마사랑방'이라는 사내 휴게실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눈물만 닦고 앉아있었다.
그 회사는 승진 발표가 나는 날이면 퇴근 이후 팀이나 부문 사람들이 모두 모여 '승진자 축하 + 누락자 위로'라는 명목의 회식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승진자는 마음껏 기뻐하기 어렵고 누락자는 대놓고 슬퍼하기 어려운 참 잔인한 자리였다.
퉁퉁 부은 얼굴로 뒤늦게 회식 자리에 참석한 나는 사람들이 애매한 표정으로 건네는 위로와 격려의 말에 '괜찮습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하지 못했다.
'뭐, 승진에 한 번 정도 떨어질 수 있지'라고 넘기기에는 앞으로의 일들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올해의 승진 누락은 1회가 아니라 육아휴직 기간에는 승진이 불가능하니 또 한 번, 복직 이후 몇 개월 일하고 바로 승진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또 한 번... 이렇게 총 3년의 시간이 걸린 일이었다. 인생에서 3년은 길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내가 회사 생활을 10년 정도 더 하게 될 거라 예상하면 거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기간이다.
물론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바로 출산휴가 3개월 이후 바로 복직하는 것이다. 실제로 회사에는 쌍둥이를 출산하고 4개월 만에 복직하여 과장 승진과 이듬해 팀장 타이틀까지 얻은 워킹맘도 있었다. 내가 미혼이었을 때 진행 한 승진자 교육과정에서 그 과장님과 함께 연수원 방을 사용했다. 과장님은 아직 모유수유 중인 시기라서 두어 시간에 한 번씩 방으로 가 유축을 했고, 유축한 모유는 팩에 담아 교육 진행실에 있는 냉장고에 보관을 했다. 그 과장님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회사에 헌납함으로써 승진과 회사의 인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출산휴가 이후 바로 복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아는 출산 전에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웠다. 원래 잠을 깊이 못 자고 예민한 나는 출산 이후 엄청난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아이도 나를 닮았는지 자주 깨고 잠들기 쉽지 않은 성향을 가졌고 10개월이 돼서야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함께 육아를 하던 친정엄마와 나는 모두 수면부족으로 인해 수시로 두통약을 먹게 됐다. 출산휴가만 끝나고 바로 복직을 했다가는 내가 아니라 친정엄마가 육아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걱정됐다. 게다가 당시 MBA 과정도 병행하고 있어서 내 체력으로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인 육아휴직을 포기할 만큼 이 회사에서의 승진이 나에게 중요한 것일까?"
소위 '순혈주의'를 외치는 HR 리더가 있는 조직이었다. 공채 몇 기수인지가 서로 간의 관계를 결정지어주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기업에서 경력직으로 입사해서 만 6년을 근무한 나는 아직도 그 조직의 '가족'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신입 입사+공채 출신+남성'이라는 삼박자가 모두 갖춰지지 않으면 HR 조직 내에서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육아휴직을 반납할 만큼의 충성심을 보여도 나에게 '과장'이라는 타이틀은 쉽게 주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결국 승진한다고 하더라도 '승진하려면 육아휴직을 하지 말아라'라는 불문율을 남겨 이후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할 수 있는 후배들에게 더욱 큰 부담을 안겨주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직을 결심했고 육아휴직 1년을 이직을 위한 준비 시기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이직 과정이 아주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육아휴직 중이라는 이유로 헤드헌터에게서 '기업에서 경단녀는 선호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고, 직무와 자격요건이 너무나도 잘 맞아 헤드헌터도 서류통과를 자신 있어했던 기업에서 '남성 후보자를 선호한다'라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국 이직에 성공하여 과장이란 직급과 파트장이라는 직책, 그리고 연봉 인상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이직 이후의 삶이 탄탄대로는 아니지만 복직이 아닌 이직을 선택한 것은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엄마로서의 삶을 생략' 하기를 원하는 그들이 아닌, 나 스스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