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롤모델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리 시절 약 3년간 파트장으로 함께 일했던 A과장이라고 이야기한다.
A과장은 참 열정적이고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일에 대한 깊이, 업무 추진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항상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조언을 해 주는 그녀에게 나는 '정말로 후배 직원의 발전을 위한 피드백을 해 주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 생활에서 좀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던 나인데 그녀는 그 무섭다는 직속 상사임에도 불구하고 업무 이야기뿐 아니라 개인사에 대한 고민까지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선배이자 상사였다.
그녀는 팀장에게도 신임받는 부하직원이었다. 팀장은 그녀의 조언이나 업무의견을 귀담아 들었고, 너무 열심히 일하는 그녀에게 건강도 생각해서 좀 쉬엄쉬엄 하라고 이야기해 줄 정도였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퇴사했다. 이직이 아니라 다음 갈 곳을 정해놓지 않은 퇴사.
팀장은 퇴사 의사를 밝힌 시점부터 A과장에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팀원 모두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고 퇴사일까지 약 2주의 기간 동안 팀의 분위기는 살엄음판이었다. 그 누구도 왜 팀장이 그렇게 화가 났는지, A과장이 왜 퇴사를 하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고 이야기해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A과장이 퇴사하게 된 날, 그녀는 엉엉 울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신촌의 한 카페에서 A과장을 만났다. A과장은 두어 달 공백기를 갖다가 타 회사로 이직을 했다고 한다. 그 날의 만남에서 나는 당연히 퇴사 사유와 왜 그렇게 팀장이 화가 났었는지 물었다.
"나의 업무 역량이 아닌 출신으로 평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회사는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어."
A과장이 말하는 갑작스러운 퇴사 사유는 짧게 요약하자면 '회사의 핵심인재 선발에서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는 핵심인재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는데 그녀는 바로 그 프로그램의 기획자이자 담당자였다. 팀의 파트장이고 항상 상급의 평가등급을 받아왔으니 팀장은 당연히 A과장을 핵심인재로 선발하려 했다. 핵심인재 선발의 조건은 '파트장 직책의 추후 팀장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인재'였다.
하지만 항상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HR 조직의 리더가 팀장에게 A과장이 아닌 같은 팀의 B과장을 핵심인재로 선발하도록 '지시'했다. B과장은 파트장이 아니었고 내가 보기에 A과장에 비하여 업무적인 역량이나 지금까지 이룬 성과도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B과장의 강력한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팀 내 유일한 '순혈파(신입 공채 출신 남성)'라는 것이었다. HR 리더가 보기에 경력직으로 입사했고 누가 봐도 능렸있어 탐낼만한 인재인 A과장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고 B과장은 소위 말해 회사에 뼈를 묻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요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B과장이 핵심인재로 선발됐고 A과장은 밀려났다.
"핵심인재가 되고 안되고 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그 조직에서 나를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였지."
팀장의 입장에서는 '핵심인재에 선발되지 않은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라고 생각하고 갑작스럽게 퇴사하는 것이 황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다른 조건이 아닌 업무로서만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그 조직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에 옮겼다.
HR 조직의 리더 입장에서는 '역시 '여자+경력직입사자'는 안돼. 또 이렇게 퇴사하잖아.'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런 결과를 부른 것은 기준에 맞지 않은 제도 적용 때문이었고, 회사는 어쩌면 앞으로도 쭉 회사에 기여할 소중한 인재를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비록 A과장이 몇 해 더 일하다가 이직이나 퇴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그녀가 이루어 놓은 일이나 성과, 인간관계 등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다른 직원들의 동기부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A과장은 이직 한 회사를 1년 반 정도 더 다니면서 본인이 목표로 했던 전문코치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직심리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결국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본인의 꿈을 찾아 항상 열정을 바치는 그녀의 행보는 듣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에너지를 전이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경로를 개척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을까. A과장이 박사과정을 할 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정말 인생을 시간이 아니라 분 단위로 쪼개서 살았어.
"회사 생활을 할 때는 직장인의 역할뿐 아니라 엄마, 아내, 딸, 며느리의 역할을 해야만 했지. 박사과정을 하는 지금도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20대의 팔팔한 학생들 속에서 그래도 사회 경력 좀 있으니 맏언니다운 노련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학부 때부터 심리학을 전공한 다른 박사과정 사람들 속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해야 해. 밤에 아이를 재우고 혼자서 밤 새 영어 논문을 보면서 너무 어렵고 힘들어 엉엉 우는 날도 있었지. 하지만 모든 것은 나를 위한 선택이었고 이 선택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 허락할 수 없었어. 주변의 영향에 의해서 멈추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사는 삶이 나에게는 소중하니까."
나는 그녀의 주도적인 선택과 삶의 방식이 부럽고 닮고 싶었다. 주위의 환경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본인이 스스로 결정한 것에는 아무리 힘든 과정이 찾아오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면에 여러 갈등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찾아 결정하고 힘든 과정이 오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본인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종종 내 삶에 대해서 주변 환경의 영향을 핑계로 좀 포기하거나 느슨하게 살고 싶은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A과장에 대해서 생각한다.
A과장, 아니 이제 A박사라고 불러야 하는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도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준 그녀는 내 삶의 방식의 롤모델이다.
여담이지만 A과장이 퇴사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핵심인재 프로그램' 선발 대상자가 된 B과장도 결국 타사로 이직했다. 조직에 충성할만한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직하는 것은 그 조직을 배신하는 행동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