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두나 Jul 26. 2019

워킹맘이라고 욕심이 없겠는가

90년생 후배 L이 입사하던 날 '아, 드디어 90년생 팀원과 함께 일하는 날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가까운 나이 차이지만 L 은 정말 본받고 싶은 부분이 많은 후배였다.


교육학을 전공한 L은 대학 시절부터 기업 HRD 업무에 관심이 많아 인턴이나 교내 취업을 위한 커뮤니티 활동을 꾸준히 한 준비된 인재였다. 면접을 볼 때도 부드럽지만 자기주장을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를 팀장은 마음에 들어했다. 귀여운 미소를 짓는 팀의 막내는 입사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 팀장을 비롯한 팀의 선배들에게 조심스럽게 작은 카드를 한 장씩 내밀었다. 내가 받은 카드를 펴 보니 동글동글한 손글씨로 '함께 일해서 돼서 정말 기쁘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열심히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성실한 태도와 상사와 선배들에게 사랑받을만한 행동, 일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속도도 빨랐으며 어떤 업무가 주어져도 의욕적으로 임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러 동료나 후배를 만났지만 이렇게 참 태도든 역량이든 모든 부분이 예쁘고 기특한 후배는 처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 모두가 후배 L의 미래와 성장을 기대했다.


회사 생활을 하던 중 후배 L은 어느 미팅에서 자신보다 10살 많은 남자를 만나서 연애를 하고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20대 중반의 요즘 기준으로 보면 조금 이른 나이의 결혼이었다. 하지만 어린 신부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좋은 남편과 함께 신혼생활을 보내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후배 L은 결혼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팀원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렸다. 임신하고 나서도 힘들어하는 내색도 하지 않고 만삭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하며 회사 생활도 순조롭게 했다. 우리 팀의 유망주였기 때문에 임신 중이었으나 승진심사에도 통과하여 출산휴가 중에 대리 승진을 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꽤나 예외적인 발령이긴 했지만 L의 업무역량이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출산휴가 중 승진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L은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개월을 사용하고 출산 후 4개월 만에 복직했다. 어린 나이에 처음 하는 육아가 힘들었는지 약간 통통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좀 야윈 모습이었지만 복직한다고 오랜만에 머리도 하고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고 온 그녀는 살짝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저는 회사 체질인가 봐요."


하지만 회사생활은 처음 복직하는 날처럼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 부부는 신혼집을 L의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얻었는데, 반대로 남편은 회사와의 거리가 꽤 멀어서 왕복 3~4시간가량을 출퇴근에 사용해야만 했다. 차가 막히는 시간을 피하려다 보니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집에 들어왔고 L의 월급 반 이상을 써가면서 고용한 육아도우미가 하루 12시간 동안 아이를 돌봐주기는 했지만 퇴근 이후 급하게 집으로 달려가 육아를 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 L의 몫이었다.


"결혼 전에는 일이 많으면 야근을 하면서 어떻게든 내가 맡은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6시에 칼퇴를 하면 택시를 잡아타고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가야만 해요. 예전에는 어떤 일이 주어져도 근무시간을 늘리면서 일할 수 있으니 걱정이 없었는데 요즘은 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요."


사실 내가 복직하면 나와 함께 업무를 좀 나눠서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L에게 나의 퇴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미안했다. 하지만 L은 원망이나 실망의 반응보다 오히려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직하셨어요? 헤드헌터와는 어떻게 연락이 닿는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5년 가까이 근무한 직장이고 회사에서도 인정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이직이 성공이나 성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또 다른 업무를 하면서 경험을 넓혀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L은 대학원도 다니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의 맞벌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좋은 육아도우미를 구했지만 도우미도 퇴근시간이 있었고 남편은 집에 오면 밤 10시가 다 됐다. 매일 자신만 육아에 붙들려있어 한 번은 남편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L에게 '자신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승승장구해야 나중에 부담하게 될 가장의 무게를 견딜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L은 대답했다.


"나도 성공하고 싶어! 나도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다고!"


L의 남편의 말에는 워킹맘이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은 길지 않고 자신의 사회생활이 가정의 경제적인 뒷받침에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L은 남편보다 10살 어리니 사회생활을 더 오래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실제로 그 당시 L의 연봉은 남편보다 높았다.


물론 나이와 연봉이 사회생활을 오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지어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의 남편조차 여성의 사회생활을 '그저 적당히 하는 것'으로 전제하는 현실이 씁쓸했다.


엄마도 얼마든지 야망이 있고 욕심이 있을 수 있다.





내 남편도 내가 두 번째 이직을 결심할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이직을 하면 당분간 업무강도도 더 세 질 것이고 지금 다니는 회사도 충분히 안정적이며 일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그냥 지금 회사 다니면 안 되냐고...


"내가 언제 돈 많이 벌어달라고 했어? 그냥 맞벌이만 꾸준히 할 수 있으면 돼."


그 말의 뒤편에는 일찍 퇴근해서 아이 케어하는데 시간을 쏟음으로써 남편인 자신의 육아부담을 더 증가시키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 발끈할 뻔했지만 그런 내용으로 더 이야기했다가는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지금 회사에 계속 있으면 2~3년 뒤에 권고사직당할지도 몰라. 일 편하면 회사 오래 못 다닌다는 거 몰라? 그때 되면 직급이 너무 무거워져서 이직하고 싶어도 못 해. 지금이 나한테는 회사생활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남편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내가 맞벌이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회사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고 전체적으로 지원부서 인원을 감축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는 중이라 팀에서 유일한 워킹맘인 내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내용의 '남편의 언어'로 설득해야만 했다. 


사실 이직을 결심하는 데는 남편에게 말한 이유도 일부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HRD 업무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임원의 영향력으로 인해 업무 범위가 자꾸만 축소됐고 기획성 업무는 진행하기 어려워졌으며 루틴 한 업무만 몇 달간 주로 하다 보니 이렇게 있다가는 내가 바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회사에서 더 이상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라고 판단했고, 좀 더 나를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옮겨서 열심히 일해 성과를 내고 싶었다. 일이 더 힘들더라도 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일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일 보다는 여전히 가족이 소중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항상 '인정받고 싶다. 잘하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라는 결핍이자 욕심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일'이었다. 정신없이 집중해서 일을 하고 퇴근하면 에너지도 더욱 충만해져서 아이와도 더 열심히 놀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느슨하게 하루 종일 소위 '시간 때우기 업무'를 하다 보면 점점 더 지쳐서 집에 올 때는 한 여름의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그대로 땅바닥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런 일 하려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하면서 회사를 가는 걸까?"


기왕 회사생활하는 거 그저 적당히 월급 마약 맞으면서 다니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워킹맘이라고 하면 일보다는 가정이 우선이라 일에는 열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워킹맘이라고 하고 싶은 일이 없을까. 

오늘도 워킹맘이라서 일 대충 한다는 인식을 주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고, 남편에게만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어떻게든 회사에서 인정받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친다. 아이가 엄마 회사 가지 말라고 우는 날이면 어떻게 아이에게 '엄마가 일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육아를 대신해 주는 도우미나 부모님께 더 많은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런 고군분투하는 생활 속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가고 더 성장하기 위해 애쓰는 워킹맘에게 가족이라면 '함께 헤쳐나가자'고 다독여주고, 동료라면 '힘내라'고 한 마디 해 주는 그런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에게는 직장생활의 롤모델이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