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0분 동안

거래

2020.12.26.토.22:02~22:32

by 지숲

당신의 근처, 당근. 당근 중고거래를 최근에 시작했다. 첫 구매로 자전거를 샀고, 사자마자 되팔았다. 충동적이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내 삶에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스러웠다. 다행히도 같은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금방 나타났다. 두 번째 구매는 한참 뒤에 이뤄졌다. 중간에 당근을 들여다보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첫 구매를 실패하고나니 더욱 신중해졌고, 신중하게 고르는 사이 물건들은 금세 팔렸다. 하지만 신중한 덕분이었는지 두 번째 구매는 깜짝 놀랄만큼 만족스러웠다. 플리스 점퍼와 주머니에 작게 패킹할 수 있는 경량 배낭은 필요했던 물건이었고, 알록달록한 누비 가디건은 충동구매였다. 옷은 맞춤옷처럼 내 몸에 꼭 어울렸고 배낭도 새 제품에 디자인도 예뻤다. 신이 났다. 버리려고 큰 가방에 넣어두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옷가지와 물건들을 하나하나 사진 찍어 당근에 올렸다. 하지만 막상 가격을 매기려니 마음이 작아졌다. 나름 아끼던 물건이지만 높은 가격을 책정하긴 쉽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을 무료나눔으로 설정하고 1,000원으로 시작해 제일 비싼 건 5,000원으로 했다.


당근! 당근! 당근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다. 무료나눔보다 5,000원 제품이 제일 먼저 팔린다. 그리고 브랜드 제품들이 하나둘 팔린다. 나머지 물건들도 이름난 브랜드는 아니지만 이정도면 좋은 물건이고 거저인데,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당근을 시작한지 한 달여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 나는 물건을 세 차례 샀고 또 세 차례 팔았다. 그러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있구나.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거금을 들여 사는구나. 또 신기한 건 그렇게 사서 쓰던 물건을,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비싼 값에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 물건들을 그 값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였다. 와, 세상 사람들 소비 수준이 이 정도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 비싼 물건들은 사용되기 보다 곧 팔린다는 걸.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물건을 팔기 위해 산다는 걸. 어느 명품급 등산 의류를 구입한 분이 그 옷의 결정적인 하자를 발견했지만 그 브랜드에 항의를 하기보다 그 사실을 꼭꼭 숨겼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브랜드 가치가 떨어져버리면 그 옷을 되팔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되판다고요? 입으려고 산 옷이잖아요. 부동산이 떠올랐다. 살려고 사는 게 아니라 재산 가치를 올리기 위해 사는 부동산. 초고급 아파트에 입주했다가 예상하지 못한 갖은 불편을 겪었지만 비밀로 숨겼다는 이야기. 그 사실을 들켰다간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니까.


포장 박스에 가격표까지 보관하고 있는 브랜드 제품은 인기가 많다. 쇼핑 중독이라는 남자와 사는 내 친구네 집 장롱 위에는 온갖 포장박스가 가득했다. 남편은 제품의 가치를 높이 받기 위해서 필수적이라 했다. 물건을 사면 포장부터 재빠르게 버리는 나로서는, 그 포장재를 지금껏 보관하고 살고 있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파는 물건들은 그러니 인기가 없다. 입으려고 산 물건, 시간과 생활의 흔적이 남은 물건. 아무리 값싸도, 심지어 무료라고 해도 말이다.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내 판매 목록을 보며, 어쩌면 나는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내가 진심으로, 온 존재로 현재를 살고 있구나. 삶을 위해 시작되었던 '거래'가 아예 삶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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