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면 어느 날

by 지숲

아침마다 저 감나무를 바라본다. 꽃을 그리 떨구고도 열매들이 자리를 잡았다. 꼭 잎처럼 초록이라 언뜻 봐선 보이지 않지만 하나 둘 헤아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셀 수 있다. 알이 나날이 차오르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사실 좀 어이가 없다. 언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새삼스러워도 나는 번번이 놀라곤 한다. 초록은 어느 사이 무섭도록 빠르게 자라나 기적처럼 온 세상을 뒤덮는다.


저 감나무는 말할 수 없이 가까이 있다. 성큼 훅 들어와 내 가슴께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그 존재감에 간혹 놀라곤 한다. 나는 어쩌다 이런 감나무를 갖게 되었을까. 어쩌다 아침마다 가지를 한껏 벌리고 들이대는 너를 만나게 되었을까. 나는 어쩌다 이런 집에서 살게 되었을까.


지난해 2월, 다시 과천으로, 방이 단 하나뿐인 아주 작은 집으로 이사 오면서는 생각했다. 과천에서 혼자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다니, 꿈만 같아. 그 전 해 3월에 드디어 부모님 집을 나와 독립하면서는 생각했다. 독립이라니… 독립을 하다니! 온전히 내가 경영하는 시공간을 갖게 되다니! 2013년 6월 내 이름으로 첫 부동산을 계약했을 때, 그때 그 용기는 무엇이었을까? 내 작업실이라니.


내 작업실 354공사는 북서향으로 작은 창이 나있는 열 평 공간이었다. 창 밖을 내다보면 4단지 공터에서 자란 나무들의 초록빛 우듬지가 들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창에 기대어 멍하니 초록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맞은편 아파트 창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아침 해가 길쭉하고 노란 네모를 그리는 게 고맙고 소중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빛이 박한 공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대로 충분했다. 거기서 화장실을 오가며 쌀을 씻고 설거지를 했다. 부르스타에 밥을 지어먹었다. 주방은 없었지만 넓고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게 좋았고, 거기서 태양열로 데운 따뜻한 물이 365일 나오는 게 고마웠다.


독립해 처음으로 살게 된 집 로이는 동-남-서를 잇는 창들이 줄줄이 열려있었다. 동트기 전 분홍으로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른 새벽잠에서 깼다. 아침만이 아니었다. 해가 가는 길을 따라 로이는 하루 종일 빛으로 넘실거렸다. 막 봄이 움틀 무렵이었다. 한창 풀꽃들을 뒤질 때였다. 그런데 로이를 둘러싼 동네에는 흙이라곤 없었다. 모든 흙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꼼꼼하게 덮여있었다. 별안간 숨이 턱 막혔다. 그렇게 좋은 이른 아침도 귀로는 자동차 소음과 뚱땅뚱땅 기계 소리를 실어왔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기로 했다. 초록이 뿜어내는 축축한 숨을 들이키며 걷고 싶었다.


월세 몇십만 원을 더 써야 한대도 과천으로 돌아갈 이유는 충분했다. 과연 집값은 비쌌고 내가 살만한 작은 집은 찾기 어려웠다.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을 붙잡고 같이 살자고 졸랐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동산 직거래 앱에서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데다 동남쪽으로 창이 열린 원룸을 발견했다. 늦은 밤이었는데도 보자마자 메시지를 보내고 다음날 일찍 집을 보러 갔다.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이체하고 살기로 했다. 거절해준 친구들, 고마워.


그렇게 살게 된 어기는 장난감처럼 작은 주방이 있는 단칸방이었다. 그 작은 집에 나를 맞춰 넣었다. 아끼던 물건들을 친구의 트럭에 한가득 실어 보냈다. 밤에는 침실이 되고 낮에는 작업실이 되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카페가 되는 어기가 그래도 나는 좋았다. 이제 내 아침은 지저귀는 새소리, 새소리, 새소리 그것 말고는 없었다. 집을 나서면 커다란 나무들이 나란히 서서 그늘을 드리우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렇다고 앞날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2억을 벌어 다음 집은 전세로 옮긴다고 우스개처럼 호언장담했지만 매달 모을 수 있는 돈은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고 많아야 50만 원이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여기는 오란다. 창에서 창으로 흐르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 건드리고, 저 감나무가 무례한 줄도 모르고 벽 하나를 뒤덮어버린 방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2층이고, 동향이고, 친구들과 함께 쓰는 작업실이 가깝고, 시세보다 많이 낮은 전세에 대출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했다. 큰 행운이었다. 그러니까… 방이 두 개일 것도 거기에 거실까지 있을 것도 아니었다. 서편으로 나란히 선 집이 1층이어서 이렇게 밝은 빛이 들어올 일도 그 아래로 이웃집 지붕들이 낮게 펼쳐져 그 끝에 청계산이 저 멀리 관악산이 드리울 일도 아녔다. 저 감나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쭐래쭐래 걸어서 도서관엘 가고 또 걸어서 수영장엘 가고, 우체국에 갔다가 괜스레 어슬렁 거리고, 제가 왔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트럭을 불러 세워 토마토를 사들이고, 집 앞을 지나는 친구의 목소리에 얼굴 내밀어 이름 부르는 일들이, 대체 내게 왜 일어난 걸까. 수년 전 어떤 예쁜 집 창가 사진을 들여다보다 마우스를 굴려 ‘이미지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클릭할 때 내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아냐’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로 이루어질 줄이야. 이런 기적이 일어날 줄이야.


새로 시작한 자유 수영에서 친구를 만났다. 혼자 물장구치다 가려던 나는 물속으로 다시 어서 들어가고 싶은데 얘는 해사한 얼굴로 자꾸 말을 건다. “앞으로 수영 계속 해?” “언제 언제 할 거야?” “오, 꽤 하는데?” “체력 좋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얼굴 내놓고 하는 평영은 어떻게 해?”

수영 강사 일도 했던 친구는 의욕적으로 대답한다. “그냥 하면 돼!”

“잘 안 나가고 힘들어.”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돼!”

“아……”

“입영은…? 입영은 어떻게 해?”

“입영… 그건 시간이 좀 더 걸리지.”

“그럼 어떡해?”

“좀 더 해야지.”

“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처음부터 자유형이나 평영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잖아. 근데 그게 그렇게 재밌었지. 심지어 킥판 잡고 어푸어푸할 때도 얼마나 신났어.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물살을 타고 나아가고 있었지.


그렇담 앞으로 얼굴 내놓고 하는 평영을 계속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될 거야. 부모님 집을 나와 6년 만에 오란다에 온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지금 돌이켜보면 354공사도 로이도 어기도 부족한 게 많은 집이었는데 그래도 얼마나 좋았던가. 하나하나 가꾸고 사는 게 좋았을 뿐인데 커튼봉도 만들 수 있게 되고 쓰임에 맞게 집안을 정리할 줄도 알게 되었지.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야지. 모자란 그림이어도 괜찮아. 어제 그린 번데기 아욱국 그림은 정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못 그렸지. 그런데도 그걸 생각하면 왜 이리 기분이 좋을까. 가끔 <<여우책방, 들키고 싶은 비밀>>이 더 잘 팔리지 않는 이유가 이상스럽도록 궁금한데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저 감나무가 보여줄 내일 아침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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