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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10분 동안

A4

2021.1.15:15:50~16:00

by 지숲

종이는 규격에 맞춰 생산된다. 아무 크기로나 나오는 게 아니다. 규격은 국전지와 사륙전지, 두 가지다. 국전지는 939*636mm, 사륙전지는 1091*788mm다. 국전지는 반으로 접으면 A2, 그걸 또 반으로 접으면 A3, 또 반으로 접으면 A4다. 그런 식으로 접고 접어 A5, A6... 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우리 흔히 쓰이는 A4용지는 국전지를 세 번 반으로 접은 것이다. 사륙전지를 접으면 B로 시작하는 규격의 종이가 만들어진다. 문방구에서 도화지를 살 때 2절지 4절지 하는 건 B2, B4 규격을 말하는 거다.


디자인 대학에 진학해 처음 내가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완전히 낯선 규격의 책을 만들고 싶었다. 위아래가 길고 가로 판형이 좁은 책이나 커다란 정사각형 포맷의 책도 재밌어 보였다. 하지만 저 통일된 생산 규격 때문에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됐다. 규격에서 벗어나면 버려지는 종이가 많이 생긴다는 걸 말이다.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규격을 따르는 게 좋다고, 업계에 있는 모두는 그렇게 말했고 나도 수긍했다.


별주막 주방에서 일을 도우며 주방 용품들도 규격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식기세척기의 가로세로 규격에 가스 불판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야끼바라고 불리는 생선 굽는 그릴의 받침도 빈틈없는 식기세척기 규격이었다. 별주막 주방에서 쓰는 제일 큰 찜기를 엎으면 지름이 식기세척기 가로세로 규격에 딱 맞았다.


별도가에서 빚을 술을 담는 용기를 고민하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용기들이 있고 그런 용기들로 사방 벽이 가득찬 어떤 용기업체에 찾아갔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딱 그 용기는 찾지 못했다. 제작해서 새로 쓰는 것에 대해 여쭙자, 모양을 만들어내는 금형비만 700만 원이라 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시길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급히 더 필요할 때 다른 병들은 재고가 많은데 그 병은 새로 만들어야 하잖아. 미리미리 챙겨도 꼭 어긋나.


틀을 깨는 일은 그만큼 부담스러운 일. 꼭 필요한 일일까?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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