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소 Jan 31. 2021

예민함이 주는 위로

오랜만에 내려간 친정집 베란다 구석에서 예전 내 물건들을 발견했다. 대부분 정리하고 남은 단출한 쇼핑백 하나 정도 물건들. 대학시절 전공책 두어 권, 고등학생 때 좋아하던 작가의 소설 두어 권 그리고 고등학생 때 썼던 두 권의 일기. 다른 걸 찾으러 베란다에 나갔던 참인데 우연히 예전 물건들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일기 두 권을 모두 훑었다.


그날의 날씨는 어땠는지, 그 무렵 즈음 무슨 생각을 작은 속에 채워 담고 있었는지 열여덟 열아홉살의 내 하루가 일기 속 한 페이지에 있었다. 그날그날을 기록해 둔 일기들 사이에는 드문드문 수필인지 소설인지 아니면 그냥 내 이야기인 건지 알 수 없게 뒤섞여 쓰인 글들도 있었다. 작게 웃음이 샜다. 아, 이때도 나는 글을 쓰고 있었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생각들을 써내려 간 기록이 서른 언저리, 여전히 이름 모를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게 묘해서 웃음이 났다.


지금도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지만 그때의 나는 더 많은 생각과 복잡한 감정의 타래를 가진 사람이었다. 얼기설기한 타래들을 넘치게 끌어안고 있던 그 무렵의 나는 그걸 버텨내려고 늘 힘을 주어 마음의 날을 새우고 있느라 저도 모르게 고단하고 자주 외로웠을 거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 안된 글로 써 내려갔던 걸까. 아마 그게 많은 생각과 감정의 타래들을 풀고 혹은 다시 묶어 내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나이 듦이 주는 위안처럼 품고 있던 타래들은 훨씬 가벼워졌으나 나는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고 종종 그걸 글로 써 내려가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에게 숨 쉴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마음에 생긴 틈을 채워 묶기도 한다. 많은 날 오래도록 나를 고단하게 했던 많은 생각과 복잡한 감정이, 그 예민함이 오래도록 내게 글을 쓰게 한 거다. 그 예민함 때문에 나는 스스로 환기하며 조금씩 단단해져 올 수 있었다. 나는 예민해서 글을 쓴다. 그 예민함이 주는 위로를 받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가 잠든 시간, 갈 곳이 있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