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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Feb 25. 2021

너의 엄마인 나도 거기 있었다.

어느 날 내 사진이 필요해서 급하게 핸드폰 사진첩을 뒤적이며 쓸만한 사진을 찾아보는데 스크롤을 아무리 내리고 내려도 제대로 나온 독사진이 한 장 없었다. 핸드폰 앨범에 사진이 만 오천 장이나 있는데 그중에 제법 사람처럼 나온 사진은 옛날 고랫적에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벌써 몇 년 전 사진이라 이걸 요즘 내 모습이라고 하기엔 조금 머쓱한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메모리가 터지도록 저장된 사진이 만 오천 장이나 있는데 그 속에 나는 없고, 전부 아이뿐이었다.


눈만 겨우 뜬 꼬물이, 나비잠 자는 모습, 으악 하고 우는 얼굴, 이유식을 온 사방에 바르고도 해맑은 표정, 아빠 손잡고 아장아장 걷는 모습, 말을 틔우며 아기 발음으로 짧은 문장을 말하는 목소리, 흥에 겨워 춤추고 노래 부르는 모습, 스케치북 한 바닥을 꽉 채운 그림을 들고 화가처럼 뿌듯한 얼굴. 내 사진첩 속엔, 내 시간 속엔 온통 아이로 가득하다. 사진첩 주인인 내 사진이라곤 고작 아이를 안고 사진 한 구석에 서있거나, 아이 손을 잡고 걷느라 얼굴이 반만 나온 것들이 전부다.


결국 필요한 내 사진은 제대로 찾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할 일도 잊은 채 사진첩 스크롤을 내리며 거슬러 올라가는 아이의 시간을 훑고 있다. 주인이 바뀐 사진첩을 한참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싫지 않다. 사진첩을 따라 내 시간의 주인도 바뀌었는데 그게 그리 서글프지는 않으니 묘한 일이다. 내 사진첩 속에, 내 시간 속에 나는 어디로 갔는지, 꼭 없어진 것만 같은데.


아니, 사실은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늘 있었다. 아이를 안고, 아이의 손을 잡고, 웃는 아이 얼굴에 함께 따라 웃으면서, 옹알이와 노랫소리에 박수를 치면서. 아이의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서툴지만 사랑하는 눈의 엄마가 되어서, 나는 그렇게 있었다.


아이의 순간을 담아온 수많은 사진 속, 앵글 그 반대편에 내가 있었다. 어느새 사진의 주인 자리는 내어주고 카메라를 든 모습으로 사진 바깥에 서있지만, 기억해줄래. 너의 엄마인 나도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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