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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Feb 27. 2021

아이가 깨끗하게 비워 낸 식판, 그게 뭐라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육아의 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양대산맥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아이의 잠과 밥일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동의할 영원한 애증의 포인트. 세상에 군 생활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와 영웅담 하나쯤 없는 남자가 없듯, 엄마들도 아이 키우며 겪은 수많은 이벤트와 찬란한 무용담 하나쯤 없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혹 현생에 로또 맞을 확률로 잘 먹고 잘 자는 기적 같은 아이를 만난 엄마가 있다면 네, 정말 부럽습니다. 아니 각설하고, 나 역시 많은 부모들이 차린 치열하고도 처절한 육아 고생담의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쯤 얹을 수 있는 짬은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먹는 것과 자는 것에 있어서는 어디서나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아이였다. 잘 먹고 잘 자는 걸로 내밀 수 있는 명함이었다면 참으로 좋았으련만, 안 자고 안 먹데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이유식 시작하기 전까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안 먹는 재능. 첫째가 이유식 할 시기 즈음 주재원으로 나가 있던 신랑을 따라 아이와 나도 중국 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중국어 벙어리에 까막눈인 나는 사전을 찾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이유식을 만들어야 했다.


요리 쪼랩이 2시간 넘게 뚝딱거리는 사투 끝에 매끼 먹일 다른 종류의 이유식을 겨우 만들어 내면 아이는 채 다섯 숟가락을 먹지 않았다. 그때의 기분이란. 절망적이고 야속했다. 그 작은 이유식 용기 하나를 비우는데 아이는 무슨 신념이 있는 사람처럼 먹지를 않았다. 내가 요리를 못해서인가, 아이가 원래 입이 짧은 건가, 무엇이 문제인가 하루 세 번 이유식을 먹일 때마다 아니 아이를 보는 순간마다 머리를 싸맸다. 밥에 대한 투쟁은 이유식이 끝나고 아이가 어른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기가 되어서도 계속됐다. 물론 아주 천천히 개미 눈곱만큼씩 먹는 양과 속도가 나아지기는 했다. 아이 키우며 시간이 약이다, 때가 되면 한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실제로 나도 많이 경험해봤다. 그런데 그게 참, 그 시간과 때라는 게. 그렇게 간절한데 그리 더디고 야속할 수가 없다.


안 먹고 안 자는데 남다른 재능과 끈기가 있었던 아이는 어느덧 여섯 살이 되었다. 36개월 영유아 검진에서는 끝끝내 키 하위 1%를 찍으며 맘고생도 많이 했지만, 정말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그 약이 때를 천천히 가져다 준건지. 이제 그 아이는 식사시간에 채워 준 식판을 제법 비워내는 아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제 입에 맞는 것만 먹고 밥보단 간식을 사랑하며 밥 먹는 시간이 3살 동생보다 오래 걸리는 입이 짧은 아이다. 또래들과 서면 손바닥 하나가 모자란 키로 밖에 나가면 “4살이야? 아니 5살인가?” 하는 소리를 듣는 꼬꼬마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만해도 아이에게 고맙고 시간에 감사하다.


가끔씩 밥을 먹던 아이가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표정으로 “엄마, 이거랑 이거랑 같이 먹었더니 하트 맛이나! 이거 엄청 맛있어! 엄마도 먹어봐!” 하고 말할 때. 프랑스 사람처럼 오랫동안 밥을 먹으면서 하고 싶은 말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참을 인 새기는 기다림 끝에 깨끗하게 비워진 식판을 볼 때. 그게 뭐라고. 고마운 생각이 들고 뿌듯한 마음이 된다.


애쓰고 공들여 만든 이유식을 먹지는 않고 온 몸에 바르고 좋다고 웃는 아이를 보며 “왜 이렇게 안 먹냐 진짜, 한 숟가락만 먹어줘 제발.” 하며 이유식 스푼을 들고 속절없이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던 과거의 나에게. 야속한 말이지만 정말 시간이 약이 되더라고. 애쓰고 있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때가 되니 아이가 비워 낸 식판으로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인사처럼 위로를 받는 때도 온다고. 아이가 깨끗하게 비워 낸 식판,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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