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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Mar 02. 2021

느적느적 문장 녹여 읽는 시간

아이 낳고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소망 중 하나는 아이들과 독서 독립 하기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 아이 낳기 전엔 나중에 엄마가 되면 아이에게 책 읽기는 괜찮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내가 책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이 키우며 직접 경험해 보니 나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게 싫은건 아니다. 엄마로서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일은 내게도 의미가 있는 일이고 그만의 기쁨이 있다. 하지만 매번 목소리 달리해가며 구연동화를 하고 그 방법으로 같은 책을 십 수 번 반복해서 읽어 주는 게 내 독서 취향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게 됐다.


나는 다독과 속독에는 재주가 없는 느린 독자라 책을 읽을 때 천천히, 문장을 녹여먹는 수준으로 읽는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도가 높아서 읽는 순간에는 책에 푹 빠지곤 한다. 그러다 종종 좋은 책,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 빳빳한 종이 위 활자에서 느껴지는 그 생동감과 황홀함이 좋다. 느린 속도로 책 한 권을 다 읽으려면 시간은 꽤나 걸리지만 시간을 들여 고른 책의 문장들을 읽으며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에 담는 그 과정이 모두 즐겁다.


헌데 어린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런 시간을 갖는 게 물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전과 비교해 쉽지는 않았다. 존경스러운 분들은 아이 키우면서도 책을 많이 읽으시던데 육아하며 정신력도 체력도 가루 먼지가 돼버린 나는 아이가 잠들면 지쳐서 같이 잠들어 버리는 날들이 더 많았다. 작년엔 코로나로 가정 보육까지 하게 되면서 아이들과 종일 붙어 지내는 날이 길어지니 책 읽기가 더 쉽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내 템포대로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을 만났을 때 ‘아, 좋다.’ 하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살살 멀어지고 있다.


조금 멀어졌데도 아직 그 순간을 다 잊지는 않았다. 해서 아직 꿈은 꾼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뻗치는 첫째 아이가 한글을 떼고 두어 살 더 먹으면, 책 펼치기를 놀이처럼 즐기는 둘째 아이가 조금 더 크고 나면. 아이들과 도서관이며 서점이며 같이 다니면서 각자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 집안 어디든, 책상이며 소파며 바닥이며 제가 편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을.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올 것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말랑한 설렘이 되는 일들이 있다. 반복되는 패턴의 하루가 익숙한 사람에게 그 말랑한 설렘은 기다림의 지루함 마저도 가볍게 해주는 살랑한 즐거움이다.


글로 그림으로 제 마음의 즐거움을 오롯이 느끼는 시간. 느적느적 문장 녹여 읽는 시간.

아, 생각만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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