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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Mar 06. 2021

낯선곳으로 갑자기 나선 외출

_ 코로나 시대의 어떤 여행

어젯밤은 불금이라. 주중에 몽땅 끌어다 쓰고 이미 깔딱깔딱하던 기력도 어쩐지 슬금슬금 되살아 나는 설레는 밤. 매번 마음만 설레었지 뭘 대단히 하는 건 없지만서도. 사실 신랑이랑 영화라도 한 편, 아니면 주말 예능이라도 같이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나보다 먼저 바닥난 체력으로 아이들 재우다 함께 꿈나라로 떠나 버렸다. 괜히 살짝 설레는 금요일 밤에 이 집에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김이 약간 빠졌다. 아쉬운 대로 박정민 씨가 읽어주는 ‘쓸 만한 인간’ 오디오북을 asmr삼아 들으며 낄낄거리다 잠이 들었다.


토요일 아침, 뭘 제대로 불태운 금요일 밤을 보낸 것도 아닌데 왜 내 몸은 어디서 사정없이 두드려 맞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 주말 평일 구분이 없는 우리 집 두 꼬맹이의 모닝 샤우팅 덕분에 무거운 잠결에서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방망이찜질당한 느낌의 뻐근한 몸으로 비척비척 방에서 걸어 나와 지난밤 아쉽게 이별했던 신랑과 잘 잤니,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바통터치를 했다. 신랑이 쪽잠을 자는 동안 집안일 하고 애들이랑 좀 뭉그적거리니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평소와 같은 날인데 주말은 시간이 훅훅 잘도 지나간다.


각자 다른 기상시간으로 점심 식탁에서야 마주 앉은 네 식구. 오늘처럼 일정이 없는 토요일이면 느지막이 차린 점심을 먹으며 늘 ‘우리 오늘 뭐하지?’를 주제로 토의를 한다. 사실 이 토의에는 어느 정도 정해진 결론이 늘 있다. 평일 내도록 집에만 있던 아이들을 위해 근처 공원에 가거나 동네 산책을 하자는 결론. 답이 거진 정해져 있어도 우리는 주말마다 성실하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 오늘 뭐할까?”


몇 군데 익숙한 공원 이름과 아이들 놀릴 만한 넓은 장소가 후보에 오르고 오늘도 우린 그중 어딘가로 산책을 나갈 것이다. 늘 그랬듯 유모차와 킥보드를 들고서. 대충 예상되는 익숙한 장소들을 생각하며 점심 식사를 마쳤다. 적당한 배부름을 느끼며 빨래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고개를 돌려 베란다를 보는데, 베란다 밖 하늘이 참 맑고 푸르다. 요 며칠 답답하던 미세먼지가 사라진, 겨울과 초봄 사이의 청량한 하늘. 그리고 문뜩.


‘오늘은 혼자 어디든 가면 좋겠다.’


정말 퍼뜩, 아무 이유 없이 오늘은 혼자 어딘가로 외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먹는 내내 신랑과 ‘우리 오늘 뭐할까?’를 이야기해놓고 갑자기 혼자 외출을 하겠다니 신랑에게 좀 미안해졌다. 설거지하고 있던 신랑에게 다가가 살며시 말을 건넸다.


“여보, 나 오늘은 혼자 외출해도 돼?”

“그래? 응, 다녀와.”


내가 혼자 시간을 갖는 것에 언제나 관대한 신랑은 갑작스런 나의 외출 요청에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쿨한 동의를 얻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간단한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유모차 대신 가방 하나를 든 손은 자유롭고 머리 위 하늘은 맑고 푸르다. 어디로 갈까, 뭘 할까. 일단 어디든 가서 커피를 한 잔 마시자. 그리고 그때 하고 싶은걸 하자. 전에 어디서 봤던 성산동의 어느 카페가 생각나 목적지로 정하고 지하철을 탔다.


오랜만에 타고 나가는 지하철. 주말이고 평일이고 구분 없이 바쁜 서울의 사람들.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한강과 국회의사당. 지하철 타고 지나며 보는 한강은 왜 항상 내 시선을 붙들까.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서치 하다가도 그 구간을 지날 땐 잠깐이라도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눈을 맞췄다. 꼭 막 상경한 사람처럼. 오늘은 갑자기 나선 외출에 차창 밖 반갑고 익숙한 풍경위로 설렘까지 겹친다.


지하철에서 내려 마주한 낯선 동네와 처음 가보는 카페. 지도 어플을 보며 길을 찾아 작은 카페 앞에 도착했다. 카운터 앞에서 뭘 마실까 잠깐 고민하다가 늘 마시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작고 조용한 카페 안에는 처음 듣는 노래가 흐르고 있다.


처음이라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이 적절히 섞여 있는 순간. 갑자기 어느 여행지에 온 기분이 들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걷다 눈에 들어온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기분. 처음 온 카페에서 익숙한 아이스 카페라떼를 마시며 지금은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고 다음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이따 카페 문을 열고 나서면서 생각해 볼 참이다. 그다음이 무엇이 되든 그냥 괜찮을 것 같다. 어쩐지 오랜만에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 들어서. 원래 계획대로 돼도 좋고 예상 못한 일을 만나도 추억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여행이니까.


문뜩 떠오르는 오래전, 그때는 아마 봄이었던가. 미국에 잠깐 있었을 때 친구랑 지하철 타고 수업을 가고 있었는데 창밖을 가만히 보던 친구가 목적지가 아닌 어느 역에서 갑자기 내렸다. 예고 없던 상황에 놀란 내가 “야, 너 어디가!” 외쳤고 친구는 되려 멀쩡한 얼굴로 “나는 오늘 수업 안 갈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좀 걷고 싶어.” 하더니 손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매일 타고 다니던 노선이었지만 친구가 내린 그 역은 우리가 가본 적 없는 곳이었는데, 친구는 그날 갑자기 그 역에서 내렸다. 날씨가 좋으니 좀 걸어야겠다면서. 게다가 그날 수업까지 홀랑 다 제껴버리고. 의외로 성실하게 고리타분해서 생전 자체 휴강이라곤 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때 그 친구의 행동이 좀 엉뚱하고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십 년쯤 지나 오늘, 모르는 역에 무작정 내린 그 친구가 생각났다. 그 날 무작정 낯선 곳을 걸었던 걸음이 그 친구에게는 어떤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꼭 먼 곳으로 오랫동안 떠나지 않아도 어떤 걸음은 그 자체로 여행이 되기도 하는 거였다. 낯선 곳에서 느끼는 새로움, 그러다 가끔 익숙한 것도 만나는 반가움. 그 모든 순간을 즐겁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다면. 오늘 계획도 없이 갑자기 나섰던 외출은 오랜만에 떠난 여행 마냥 묘하게 설레는 즐거움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피곤함과 살짝 무거운 다리까지. 다를 것 없는 여행의 무게였다. 집에 도착하면 씻고 누워 잠들기 전에 오늘 찍은 사진을 훑어보며 기억을 가다듬겠지. 그것까지 꼭 닮은 여행의 뒤풀이가 되겠다.


언젠가 하늘이 맑은 날에, 오늘처럼 갑자기 낯선 곳으로 외출을 하고 싶다. 여행이 되는 어떤 걸음들이 많은 날들을 살고 싶다. 오늘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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