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소 Feb 23. 2021

별거 아니지만 사실은 별거인 일들

코로나가 창궐하고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사는 동안 ‘창궐’이라는 단어를 사전적 의미 그대로 쓰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는데.. 놀랍게도 그런 날들을 벌써 1년 넘게 보내고 있다. 코시국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아이 둘 가정 보육하며 집콕한 시간도 그만큼 길어지고 있다. 아마 이 사태는 누구 한 사람 조심하거나 어떤 사건 하나 막았다고 해서 영원히 벌어지지 않을 일은 아니었을 거다. 코로나 19라는 이름이 아니었어도 멀지 않은 미래에 다른 이름으로 우리는 이런 시국을 분명 마주하게 됐을 테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듯, 코로나는 종식 없이 계절성 질환으로 남을 확률이 높으니 온 인류의 염원에도 코로나는 그리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도무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작년 이맘때의 막연함과 두려움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상황이 어느 정도 예측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가늠이 된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런 시간이 전혀 버겁지 않거나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세계와 더불어 나도 같이 도둑맞은 2020년 한 해가 아깝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굴 탓하거나 불평불만한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황당하고 살 어름판 같은 시국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뿐이다. 일상을 살고 내가 해야 할 수고를 하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평범하고도 소중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마음을 들여 꾸준히 하는 일이 있다. 별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과 마음을 녹이는 순간을 일상에서 자주 건져 올리는 일이다. 이건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 따라 기분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내가 내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사실 대단할 건 없고 그냥 솔직하면 되는 것 같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날들이지만 내가 어떤 순간에 웃는지, 작지만 뿌듯함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지, 가만히 “좋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을 살피는 거다. 매일 비슷한 패턴의 하루가 반복된다면 그런 순간을 찾는 게 더 쉬울 수 있다. 보물찾기 하듯 성실하게 찾아서 건져 올린 순간들을 잘 기억해두고 때마다 나에게 다시 해주는 거다. 뭐, 건져 올린 순간이라는 게 들여다보면 그리 대단할 것 없는 별거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다.


날이 좋은 아침엔 잠깐이라도 창가에 서서 쏟아지는 아침 햇빛에 머리랑 몸을 고루 감아준다던가, 하루 한번 아이 낮잠 자는 시간엔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이상 꼭 내 시간을 갖는다거나 하는 것. 그 시간에는 내가 나일 때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나는 말씀을 묵상하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쓴다. 말씀을 묵상할 때 내 삶을 이루는 그분의 섭리가 깨달아지는 신비와 감사, 좋은 책이나 그런 문장을 만났을 때의 감탄과 황홀함, 내 마음과 생각을 한 장의 그림이나 한 편의 글로 만들어 냈을 때의 희열과 위로가 좋다. 머리에도 마음에도 새 숨이 고루 퍼지는 느낌이 든다. 이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 아이가 낮잠 잘 때 집안일은 하지 말자, 라는 나름의 규칙도 세웠다. 이때 마시는 아이스라떼가 또 그렇게 고소하다. 나는 얼죽아에 카페라떼만 마시는 뿌리 깊은 소나무 같은 취향인데 아이 재우고 좋아하는 일 하며 마시는 아이스라떼 한 모금은 시럽 한 방울 없어도 기분을 살짝 달게 만들어준다.


하루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집안일을 할 때도 좋은 노래를 들으면 꽤 괜찮은 순간으로 만들어서 건져 올릴 수 있다. 이어폰보다 손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에어팟을 끼고 노래를 골라 리스트업 해서는 집안일하는 내내 듣는다. 물론 아이들이 엄마를 찾을 때가 많아 노래가 중간에 끊기는 일이 부지기수지만 그래도 괜찮다. 3분 정도의 좋은 노래 한곡이면 밋밋한 내 기분을 알맞게 데우는데 충분한 장작이 된다. 그렇게 노래를 듣고 있으면 길게 줄지어 선 집안일도 할만한 수고가 되니 이 정도면 나에겐 아주 괜찮은 연금술이다. 가끔씩 하는 덕질도 괜찮다. 잘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 한 편, 노래나 책 한 권에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그 안의 배우나 뮤지션, 작가의 반짝거리는 재능과 수고가 느껴지면 정직하게 감탄한다. 어떤 이의 재능과 그것이 만든 멋진 결과물을 접했을 때 비틀어 보지 않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마음은 나에게도 유쾌한 시너지가 된다. 그들의 달란트와 노력의 결과물들이 때론 위로가 되고 다짐을 돕기도 했다. 하루 끝에 집 정리를 거의 마치고 따끈한 물에 샤워할 때면 ‘아이고 좋다’하는 어르신 멘트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따끈한 물을 맞고 서있으면 종일 몸과 마음에 담았던 고단함이 말갛게 녹아내리고 오늘도 별일 없이 잘 보냈네 하는 감사함이 수증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이렇게 건져 올린 순간들을 보고 있으면 소확행이 떠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 시작된 소확행은 한국에 한참 유행하던 2018년이나 2019년보다 되려 요즘 같은 시기에 더 알맞고 필요한 말이 아닌가 싶다. 고단한 시간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고 지켜내도록 도와주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별거 아니지만 사실은 별거인 일들. 사람이 자기를 채우는 작지만 많은 순간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 순간을 정직하게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히 특별하고 놀랍게 감사한 일인지 몰랐다. 소소하지만 좋아하는 것들로 마음을 채우는 방법과 그렇게 채워진 마음이 삶에 만들어 내는 따뜻한 온도를 이제는 안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가 만든 황당하고 낯선 시간들이 보이기 위함이 크기도 했던 행복과 만족에 대한 솔직한 기준을 찾아 주었다.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서로 경쟁하듯 대확행을 즐기게 될까. 살다 보면 인생이 주는 크고 확실한 행복도 누리겠지만 나는 지금처럼 일상에서 건져 올린 평범하고 소중한 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다시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그래서 자주, 많이 솔직하게 즐거워하고 싶다. 그게 지독했던 코로나 블루 시대를 지내며 얻은 보석 같은 깨달음이니까. 일상의 소중함, 평범한 것이 가진 특별함. 대단할 것 없는 어떤 평범한 순간들이 오늘의 나를 채워 삶에 대한 감사를 고백하게 해 준다. 별거 아니지만 사실은 별거인 일들. 그래, 그건 별게 맞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머니에서 장난감 주사기가 나오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