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소 Apr 18. 2021

엄마의 부채감은 어디서 오는가

마음에 이름 모를 부채감이 드는 날이 있다. 요 며칠이 그랬다. 사실 이 부채감은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내 마음에 드리워졌다 사라지길 반복해왔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생각은 많아진다.


장난감과 책이 널브러진 거실과 설거지거리가 쌓여있는 싱크대. 같은 말을 수십 번 해도 듣지 않는 아이의 고집에 참을 인 새기다 결국은 폭발한 날.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었던 일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노을로 저무는 하루. 그 끝에 서면 마음 한가운데서부터 물감 번지듯 부채감이 사방으로 퍼진다. 엄마의 부채감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아이를 낳으며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워커홀릭으로 살아왔다. 그런 성향의 사람이 엄마가 되니 육아도 살림도 모두 잘 처리해야 하는 업무처럼 느껴졌다. 엄마니까, 주부니까 잘해야 하고 또 잘하고 싶은 업무. 살림과 육아가 내게 맞는 종류의 직무가 아닌 걸 알았기에 최고가 되길 바라진 않았지만 평타 이상은 치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헐겁고 느린 데다 인내심도 체력도 짤막한 내가 살림과 육아 모두 평타 이상 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잘하고 싶고 잘해야 하는 일이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닐 때 오는 무력감은 내 안에서 조금씩 몸집을 키워갔다.


정돈되지 않은 거실처럼 생각이 뒤섞인다. 그렇다면 엄마의 부채감은 육아와 살림의 굴레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엄마는 있는데 나는 없는 것 같은 순간에도 찾아왔다. 내가 하는 일을 나로 여기며 살다가 아이를 낳으며 일을 그만두고 나니 나를 잃은 기분이 들었다. 일을 나 자신으로 여겼던 건강하지 못한 위치 선정의 대가는 컸다. 아내로도 엄마로도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면 주식 그래프가 고꾸라지듯 마음도 저 아래로 처박히곤 했다.


누가 나에게 모든 것을 잘 해내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스스로를 바짝 몰아붙이고 있는 걸까. 내가 나에게 매일 많은 과업을 부여하고 시간마다 성과를 체크하는 보스가 되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엄마로도 아내로도 나 자신으로도 다 잘 해내고 싶었던 마음. 이 부채감은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가 되어서도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싶었나 보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에서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 나는 슈퍼우먼이 되고 싶었던 걸까. 일을   나는 결과를 위해 시간과 체력과 열의를 쏟았고 안되면 나를 쥐어짜서라도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결과를 만들면 만족스러웠고 인정도 받았다. 엄마가  후에도 나는 그날의 결과로  하루의 무게를 쟀다. 그런데 하루 종일 체력과 마음을  쏟아도 눈에 보이는 결과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로 산다는  결과를 만드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아니라 관계를 만드는 거였다. 인정과 만족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받아야 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도록 엄마로 살면서도 나는 그걸 몰랐다. 말로는 아이와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가 되고 싶다 했지만 정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랐던 거다. 수영하러 물안에 들어와서 야구 배트를 휘두르고 있으니 물에 뜨지도 못하고 공도 못 치는 게 당연했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다 해내지 못했어도 집은 조금 엉망이어도 엄마를 부르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었다면 그걸로 ‘오늘 하루 잘 살았네.’ 여기면 되는 거였는데.


애초에 완전하고 무탈한 육아가 있을 수 있을까. 아이가 내 마음만큼 수고만큼 잘 자라준다면 그저 감사한 일이고 어려움이 있다면 자책보다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일을 잘 못해도 괜찮은 엄마가 되고 싶다. 살림을 야무지게 못해도, 똑소리 나게 아이들 교육하며 돌보지 못해도 괜찮은 엄마. 잘 정리된 집과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하루보다 아이들 마음 한 번 더 살펴 준 나를 기특해하고 아이들과 나눈 이야기로 마음 배부른 하루를 살고 싶다. 가끔은 쌓여 있는 집안일을 미뤄두고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해도 스스로를 책하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 엄마이기 이전에 내 안에 심겨진 것들을 그대로 묻어두지 않고 성실하게 찾으며 가꿔가는 삶을 살고 싶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육아와 일상에 피곤하고 지쳐서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지만 분명 인생 최고의 선물이자 기적인 아이들을, 우리가 가족이 되어 만든 우리 집의 일들을 지워가야 할 투두 리스트나 깨야 할 퀘스트로 여기지 않고 싶다. 나를 잃고 종국에는 의무감으로 껍데기만 남은 엄마로 살고 싶지 않다. 나를 잃지 않은 엄마로 살고 싶어 매일 고전하고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잊지 않고 오래도록 애써보련다. 그리고 언젠가는 살아봐야지. 부채감이 없는 엄마의 삶을. 부채감 없이 사유하며 글을 쓰는 나로.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 날, 그런 밤. 엄마는 아이 눈에 마음을 내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