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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Apr 23. 2021

부모가 되면 아이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줄 알았다

우리 집의 빅보스 여섯 살 첫째. 요즘 첫째는 삼춘기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다섯 살 중반 무렵부터 감지된 그녀의 예민한 텐션은 지금까지 꾸준히 그 기세를 이어오고 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넘치는 에너지와 뚝심 있는 고집에 6살 언니의 예민함과 짜증이 섞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됐다. 어릴 때는 멋모르고 하는 일이니 떼를 써도 이해하고 참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 알면서도 짜증을 내고 보란 듯이 말을 안 들으니 괘씸할 때가 있다. 같은 말을 수십 번 해도 나몰라라는 기본. 한 번 기분이 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몇십 분씩 악을 쓰고 고집을 부리는데 그럴 땐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리는 경험도 한다.


한 번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장난감 코너를 구경하고 있는 첫째가 다리를 베베 꼬길래 화장실 가자고 데리고 나왔다. 첫째는 그때부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화장실 다녀와서 다시 구경하러 가자고 했지만 한 번 깨진 산통에 첫째의 짜증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코너만 돌면 나오는 화장실 가는데 한참, 변기에 앉기 싫다고 한참, 변기에 앉아서도 볼일 보기 싫다며 한참 실랑이를 했다. 그쯤 되니 나도 지쳐서 그래 볼일 보기 싫으면 화장실에서 나가자 하니 그것도 싫단다.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마트 화장실에서 몇십 분을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으니 갑자기 현타가 밀려왔다. ‘아,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볼일 한 번 보는 게 이렇게 힘들일인가. 얘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왜 매번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진을 빼야 하는 거지. 아... 다 싫다.’


화장실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그동안 아이는 화가 조금 누그러져 화장실을 나왔지만 나는 화장실에 멘탈을 두고 나와야 했다. 아이의 짜증을 받아내며 실랑이하느라 체력은 급속으로 방전이 되고 현실 육아의 현타에 정신도 가루가 됐다. 사실 예민한 기질인 첫째를 키우면서 이런 경험은 심심치 않게 해왔다. 양치하다가, 옷을 입다가, 밥을 먹다가, 머리를 감다가, 길을 가다가, 집에서, 차 안에서,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첫째는 예고 없이 짜증을 터트렸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별거 아닌 포인트에 기분이 상한 아이가 짜증과 고집을 쏟아 낼 때마다 나는 진땀을 뺐다. 진땀만 뺐을까. 내 체력도 마음도 멘탈도 다 빻아져 바람에 날아갔다. 내 아이니까, 내가 엄마니까 예민한 아이의 많은 감정들을 잘 이해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화내지 않고 아이를 이해하려 애를 쓴 날은 체력이 바닥났고 긴 짜증에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날엔 마음이 바닥을 쳤다. 고집 세고 예민한 아이의 기질이 버겁고 그걸 이해해주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평생 좋은 엄마는 고사하고 그냥 보통 엄마 되는 것도 내겐 남일 같아 보였다.


가끔은 아이가 야속하고 밉기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조금 쉽게 갈 수는 없을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짜증을 덜 내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내가 지금 여섯 살짜리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싶어 진다. 그런데도 한 번씩 아이의 긴긴 짜증에 넉다운돼서 체력도 마음도 바닥을 치는 날엔 아이를 향한 복잡한 감정과 시선이 거둬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자기 자식을 이런 마음으로 보는 엄마라니, 한심하고 무섭고 허무했다. 삽십분 한 시간쯤 지나 아이는 기분이 풀어져 다시 웃으며 놀고 있는데 나는 아이를 보며 웃지 못하겠을 때는 모든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이만한 마음 그릇으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이런 시선으로 아이를 보았다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어느 순간 마음은 늪지 깊은 곳에 빠져있었다.


부모가 되면 아이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아이가 싫은 건 아니지만 아이를 꾸준히 사랑하려면 내게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는 유명한 노래 가사도 있는데 나는 노력해야 했다. 내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서. 순간순간 던져지는 아이의 감정 폭탄을 맞으면서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를 써야 했다. 세상에 나 같은 엄마가 있을까. 이런 마음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느낄 때마다 미안하고 괴로웠다.


아이가 잠들면 지는 별처럼 마음이 착잡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다시 아이를 마주하는데 아직은 마음이 묘하다. 아이 얼굴을 보니 아이를 향했던 내 시선이 또 미안해진다. 무뚝뚝한 인사를 건네면 아이는 오늘 새로 뜬 해처럼 맑은 얼굴이 되어 나를 본다. 아무런 감정의 응어리도, 미움의 티끌도 남기지 않은 말간 마음으로 내게 온다. 엄마인 나는 여즉 마음이 시큰둥한데 아이는 내 옆에 와서 종알종알 자기 이야기를 떠들고 장난을 치고 까불고 웃는다. 어제 짜증으로 펀치를 연신 날리던 파이터는 간데없고 까맣고 큰 눈의 천진난만한 여섯 살 아이가 내 앞에 있다. 신나게 까불며 한참 웃는 아이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음이 샌다. 저도 뭘 느끼긴 하는 건지, 내게 건네는 아이의 인사가 다정하다. “엄마 잘 잤어? 엄마 이거 봐 봐. 나 웃기지? 헤헤헤.”


실없는 아이의 장난에 한 번 웃고 나니 사방이 막혀 있던 마음에 작게 숨이 든다. 아이 때문에 마음에 짐을 겹겹이 졌다가 아이 덕분에 언 마음을 녹인다. 엄마에게 칼로 물 베기는 부부싸움이 아니라 자식이었다. 종일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은 덜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에 나 같은 엄마가 있을까. 자기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엄마가. 부족한 엄마라 아이가 야속하고 미웠다가도 아이의 다정한 인사에, 해사한 웃음에 다시 웃게 되는 걸 보니 답은 없어도 길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마음도 사랑이라 부를  있을까. 그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오래오래 노력해서 사랑을 닮은 어떤 투박한 모양이라도 만들어 보련다. 너른 품의 마음은 못돼도, 필연적인 사랑은 아니어도 서툰  마음도 사랑이라 부르며 다듬어 가야겠다. 그리고 투박한 마음을 담아 아이를 그리 불러야겠다. 너는 유일하고 영원한, 서툰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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