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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May 14. 2021

엄마의 음식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모두가 하고 사는 평범한 일들이  모두에게 같은 무게와 온도는 아닐 것이다. 많은 이들이 엄마가 되지만, 그게 보이는 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평생 어깨너머로 보았던 엄마의 삶을 통해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참을성이 짤막해 단단함과는 거리가  나를  알아서,  같은 성정의 사람이 좋은 엄마가   있을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 2 만에 임신과 함께 결국 엄마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오래도록 내게는  괜찮은 답이 없다고 생각해왔던 질문에 이제는 무엇이든 답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오랜 질문에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내가 만난 새로운 길은 순식간에 눈물 나는 고행길이 되었다. 입덧도 유전이 되는지, 엄마가 임신했을  죽을 만큼 고생했다던  끔찍한 입덧이 내게도 찾아온 거다.


입덧이 시작되니 순식간에   수저는커녕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술도  마시는 내가 유리컵 안에 흔들리는 물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는 알코올 냄새를 느꼈다. 죽을 맛이라는   이런 건가 싶었다. 먹는 것은 고사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고 아침에 눈뜨면 저녁에 잠들 때까지 구역감이 느껴지니 이게 바로 죽을 맛이었다.   만에 몸무게는 8킬로 넘게 빠졌고 나는  병과 씨름하는 몰골이 되었다. 구역감 없이 삼키는   술이, 꿀꺽 시원하게 넘기는   모금이 절실했다. 몸도 마음도  바스러질  같은 날엔 신랑을 붙잡고 울었다. 목이 너무 마르다고 너무 힘들다고 엉엉 울었다. 엄마의 삶을 시작하는 문턱에서 내가 경험한 입덧은 정말 처절하고 끔찍한 종류였다.


매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하고 토하기만 하느라 초주검이 되어 있으니 신랑은 퇴근길마다 내가 먹을 만한 음식들을 이것저것 사다 날라주었다. 길고 괴로운 입덧에 지쳐 마음까지 바싹 말라비틀어졌는지 신랑이   여러 음식 중에 입에 맞는 것이 없었다.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집에 혼자 남아 하루 종일 허연 천장을 보며 누워 있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을 하고 지쳐 잠들기를 반복하며 지냈다.


줄곧 나를 걱정하던 엄마는 가장 바쁜 시기에 가게 문을 닫고 올라와  입덧 수발을 드셨다. 힘들  엄마와 함께 있어 위로가 되었지만 징글징글한 입덧은 여전했다. 엄마는 종일 자거나 토하는  전부인 나를 안쓰럽게 지켜보다  컨디션이 조금 괜찮을 때면  죽을 끓여 주셨다. 종일 쉬지 않고 메슥거리는 통에 입맛도 항상 없었는데 어쩐지 엄마가 끓여  죽은   삼킬  있었다.


생각해보면 웃기고 신기한 일이었다. 대단한 음식도 아니고 특별한 조리법도 없는, 그냥 누구나 끓일  있는  죽이었는데. 신랑이 부지런히 사다 날라 주던 음식 중에는 입에 맞는 것이 없더니 평생 먹은 엄마 손맛이  말간  죽에도 들어서였을까. 엄마가 끓인 죽을 먹을 때는 크게 구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생각을 못했는데 돌아보니 그랬다. 물만 봐도 구역질이 나던 예민한  속이 엄마가 끓인  죽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가끔씩 죽에 곁들여 먹으라고 엄마가 집에서 가져온 김치를 씻어 쫑쫑 썰어 주거나 깻잎무침을 작게 잘라주면 죽이  숟갈씩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요동치는 빈속이 받아주는 음식은  죽이나 숭늉이 전부였지만 그게 딱히 부족한  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채움 없이 그저 비우기만 하던 쓰린 속이 따뜻한   수저에 묘하게 달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에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과 따뜻한 밥상을 받으며 연명하듯 꼬박  달쯤 보내니 끔찍한 입덧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도 마시고 다른 음식도 조금씩 먹을  있게 되니 그제야 사람이 사는  같았다. 내가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엄마도 걱정을 조금 내려놓고 비워뒀던 친정집과 가게로 돌아가시기로 했다. 엄마가 돌아가는 , 가볍게 들고   가방 하나를 다시든 엄마가 현관 앞에 섰다. 겨울이라  앞까지만 배웅하라며 엄마는 나를 막아섰고 우리는 거기서 인사를 나눴다.


엄마 갈게. 그래도 네가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다. 혼자 있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너랑  속에 아기 생각해서 뭐라도 조금씩  챙겨 먹어. 알았지?” “, 엄마. 조심히 . 그동안  때문에 엄마가 고생했네.” “ 고생이야. 그게 엄마가 하는 일이지.  입덧할  엄마가 뭐라도 먹일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도 옛날에 입덧 심해서 너무 고생했는데. 네가 엄마 닮아 고생한다. 엄마가 미안해.” “별소릴 다하네. 그게  엄마 탓이야. 아니야. 힘들었는데 엄마랑 같이 있어서  외롭고 좋았어. 고마워 엄마.” “그래,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엄마 갈게. 나오지 .”


길지 않은 인사를 나누고 흔드는  너머로 문이 닫혔다. 인사할 때부터 눈시울이 불긋해진 엄마 얼굴이 보여서 입술을 삐죽이며 참고 있던 눈물이 닫힌  앞에서 울음으로 터졌다. 엉엉 울면서 베란다로 나가 일층을 내려다보니  아래 손가락만큼 작아진 엄마가 걸어가고 있었다. 주차장을 지나 버스정류장에  엄마가 버스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창밖을 보며 울었다.   딸이 엉엉 울면서 11 베란다에서 고개를  빼고 한참이나 자기를 보고 있을 거라고 엄마는 아마 생각도 못했을 거다. 고마움, 미안함, 애틋함, 고단함 그리고 이름 붙이지 못할 어떤 마음들까지. 어릴 때부터 지켜봤던 엄마의 시간과 처음으로 엄마가   시간이 한데 뒤섞여 울컥이는 뜨끈한 숨이 되어 눈물로 한참을 쏟아졌다. 엄마를 태운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나는 한참을  울었던  같다. 다시 혼자 남은 , 주방을 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엄마가 끓여주고   냄비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고된 입덧에 쓰린 속을 달래주던 엄마의 죽처럼,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들고 고단한 날들을 지날  지친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데워주는 음식을 내가 다시 받아   있을까. 평범한  죽이지만 언젠가 내가 끓였을 때도 같은 맛과 따스함을 담아낼  있을까. 아마도 평생, 그때와 같은 죽은 다시 먹지 못할 테다.  말간  죽이 뭐라고. 떠올리면 어쩐지 눈물이 찔끔   같은 음식이 되다니.  


내게 처절한 입덧을 안겨 주었던 딸아이는 이제 걷고 뛰며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꼬마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자기를 닮아 입덧으로 고생한다며 내게 미안해하던 엄마의 마음을 조금   같다. 언젠가  아이가 엄마가 되어 입덧으로 고생하는 때가 온다면 나도  딸에게 가서 얼마라도 함께 있어주고 싶다. 괴로운 몸과 마음이 외로움에  지치지 않게 옆에서  마디라도 말벗이 되어주고 괴로워할  등을 두드려주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딸애 입에 내가 만든 따뜻한  한술,  한술  넣어주고 싶다. 그때 먹을 음식들이  아이들에게도 살면서 떠올리면 코끝이 찡해지는 묘한 음식이 되려나. 살면서 자기들도  번이나 끓일  죽이지만, 어쩐지 제가 먹을  느낀 따스함은 똑같이 담기지는 않더라는 , 언젠가 아이들도 나처럼 알게 되려나.


많은 사람들이 엄마가 되지만 저도 엄마가 되는 문턱에 서며 그제야 알게 된다. 평생을 엄마로 살며 수많은 음식을 만들어도, 내가 받았던 엄마의   그릇에서 느꼈던 그만한 온도는   없다는  말이다. 오로지  아이들만 내가 만든 음식에서 내가 먹은 같은 마음의 온도를 먹게  테다.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면서도 그리운 엄마의 따뜻한   그릇. 엄마는 오늘도   그리움을 담아 사랑하는 이들에게 먹일 따뜻한 밥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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