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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May 28. 2021

이사를 가려니까

이사 준비를 하고 있다. 결혼 후 신혼집에서 1년을 살고 이 집으로 이사 온 게 벌써 6년 전. 이 집에서 첫째가 태어났고 그 무렵 신랑이 중국 주재원으로 가면서 나는 아이와 8개월 간 친정 살이를 했다. 그 후 나와 첫째도 중국으로 가서 짧은 중국 주재원 시기를 보냈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화곡동에서 2년을 보내고야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집에 적을 두고 사는 동안 우리에겐 이런저런 일들이 참 많았다. 그동안의 크고 작은 일들만큼이나 이 집은 우리에게 많은 기억이 담긴 집이 되었다. 이 집에서 만든 최고의 기록이자 가장 큰 감사는 단연 우리가 둘에서 넷이 된 일이다. 첫째도 둘째도 집 바로 앞 산부인과 출신으로 이 집에서 태어났으니 우리 가족에게 이 집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이야기할 ‘그 집’이 될 거다. 그런 이 집에 살면서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 또 이사도 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는데 그때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올 초에 브런치에 우리 집에 대한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이사는 예상에도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었는데. 참,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말하니 어디 꽤나 먼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다음 집은 지금 집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 같은 동네의 바로 옆 옆 아파트다. 아이와 동네 산책을 하면서 수 없이 다녔던 지척으로 이사를 가게 될 줄도 몰랐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사이좋게 모인 조용한 우리 동네는 살 수록 마음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이 동네에서 더 살고 싶었다. 그렇게 이사 가게 된 우리의 다음 집은 지금 집만큼이나 세월을 지긋하게 드신 구옥인데 지금 집보다 조금 더 넓은 평수로 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집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다는 1층이지만 아침저녁으로 한시도 지치는 법이 없는 첫째와 이제 언니 따라 함께 목청 자랑하며 뛰어다니는 둘째에게 지금처럼 온갖 설득과 애원과 협박을 덜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1층이어도 층간소음은 늘 조심해야겠지만, 지금처럼 낮이고 밤이고 아랫집 윗집에 늘 죄인 된 마음은 조금 덜 가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언젠가, 언제쯤을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 몰랐던 이사를 준비하면서 재미있는 일들과 묘한 마음을 경험한다. 꼭 때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입을 맞춘 듯 잘 쓰고 있던 가구나 물건들이 조금씩 고장이 나거나 수명을 다 하고 있다. 조금 낡긴 했지만 지금까지 잘 써왔던 전신 거울 다리가 빠지더니 결국 부러져 버렸고 갈수록 더해지는 둘째의 괴력에 옷장과 싱크대 하부장에 붙여 두었던 서랍 잠금장치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이사를 가려니까 여기저기서 다들 자신의 오랜 연식을 뽐내며 돈 드는 소리를 낸다. 모두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사를 앞두고 보니 타이밍이 한 번 절묘한 것이 신기하고 재밌는 일이네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이사를 가려니까 여태껏 잘 쓰던 가구와 살림살이의 낡음이 보인다. 물론 신혼 때부터 쭉 사용해 온 살림들이라 정말 낡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는 매일 사용하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렌지대의 묵은 때와 얼룩이 보이고 화장대로 쓰고 있는 서랍장 뒷부분 오래전 부서진 모서리가 갑자기 떠오른다. 오늘도 돌린 세탁기 모서리의 작은 녹 자국이 눈에 콕 들어온다. 이사 갈 집이 지금까지 손을 거의 대지 않고 사신 것 같은 태초의 그 모습이라 큰 맘먹고 올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는데 새 단장한 집을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리모델링한 새집에 이 가구 놓으면 너무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이거 너무 낡아 보일 것 같은데.’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웬만하면 다시 잘 닦고 여며서 다음 집에서도 쭉 사용할 생각이지만 이사를 가려니까 그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가구의 얼룩과 크게 느끼지 못하던 살림의 낡음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내 마음이 어쩐지 깍쟁이 같았다.


깍쟁이 같고 재미난 그 마음은 예상외로 지금까지 생각만 하고 미뤄두었던 일도 시작하게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버려야지, 나중에 정리해야지, 다음에 치워야지 하고 여태껏 못했던 것들을 정리하도록 말이다. 6년간 이 집에 살면서 망가진 아이들 장난감, 깨진 그릇, 쓰지 않는 유모차, 안 입는 옷들, 고장 난 아기 세탁기 같은 것들이 하나씩 쌓이면서 쉽사리 손댈 엄두가 안나는 철옹성이 되었는데 곧 이사를 가야 하니 결국, 드디어. 그 철옹성을 내 손으로 허물고 하나씩 정리를 하게 된 거다. 아직 완전히 마무리는 못했지만 얼추 정리하고 치우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당탕탕, 와다다닥, 으헉. 소리를 내며 치우고 보니 그것도 웃겼다. 이사 와서 지금까지 몇 년을 미루면서 마무리를 못했던 일인데 하루 만에 이만큼이나 정리를 하다니. 어떤 결심에는 마음보다 상황이 더 빠르고 확실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끝은 필요하다. 마음에게, 또 긴긴 우리 삶에게. 길고 오랜 시간이 주는 안정과 평화도 있지만 끝을 알고 남은 시간을 계수하며 준비하는 것도 필요한 일임이 틀림없다. 어떤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하니까. 새로운 시작은 내내 신경을 쓰고 수고할 일이 많기도 해서 사서 고생하며 부담을 업는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수고로 새롭게 경작된 마음은 모든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스스로도 무엇을 담아 보내고 있는지 모를 매일과 굳은 생각에 새로운 숨길을 내기도 한다. 해서 나는 반갑다.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끝이.


6년을 살며 우리가 넷으로 완성되기까지, 많은 일을 함께 겪었던 이 집이 기억 속 ‘그 집’이 되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우리의 시간을 함께 담아낸 ‘그 집’이 될 우리 집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 앞으로 살게 될 새로운 우리 집에서 아이들이 자라 가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시간들이 기대도 된다. 이 집에서 쌓았던 많은 날들의 끝에 서서 이제 안녕을 한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 다시 안녕을 한다. 고마움과 아쉬움, 기대와 감사가 뒤섞인 설레는 인사를. 이사를 가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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