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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 Jul 26. 2021

사랑하자는 마음, 다정하자는 다짐

얼마 전부터 피부가 가렵다는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다녀와서 처방받은 약을 먹이려고 약봉지를 부스럭거리는데 봉투 위에서 우뚝 눈길이 멈췄다.


 ‘이**(만 4세/여)’


만 4세. 세상이 보는 내 아이.


‘그러네,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4년밖에 안됐지…’


봉투에 적힌 몇 글자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여러 생각이 뒤섞이며 나오는 웃음이었다.

  

한국 나이로 여섯 살. 모든 의사소통은 당연하고 분위기와 눈치까지 읽어 표현이 가능한 나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알며 그 기준으로 훈수도 두고 시시비비도 가린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 아이와의 소통이나 훈육이 대체로 일방적이었다면 요즘의 소통과 훈육은 의견을 주고받다 실패해서 다투거나 조율하고 수용하는, 훨씬 복잡한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 양방향 체계가 되었다. 엄마가 아기에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독백이 아니라 아니라 성숙한 인격체와 인격체의 대화로 진보한 느낌이랄까.


아이가 네 살까진 아기 같은 느낌이 컸는데 다섯 살 중반 여섯 살이 되니 이젠 정말 모를 것 만 빼고 다 아는 애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다 아는데도 하지 않을 때, 하지 않아야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할 때면 스멀스멀 저 밑에서부터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예전엔 몰라서, 알아도 어려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는데 이젠 눈치가 빤한데도 일을 벌이니 괘씸죄가 추가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 제 논리와 감정이 작은 제 키보다 훨씬 커진 아이와 훈육의 시간을 서로 의미 있게 마무리하려면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인내와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이가 클수록 몸은 조금 편해져도 머리와 마음은 배로 심난해진다던 육아 선배들의 말이 이런 건가. 미리보기로 살짝 맛본 다음 편이 순한 맛은 아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요즘 최대치를 경신하는 확진자가 쏟아지면서 다시 시작된 기약 없는 집콕과 가정보육에 늘어난 시간만큼 아이와 부딪히는 일은 더 많아졌다. 양반 같은 날에는 하루에 한 번쯤 심한 날은 하루에 서너 번씩 아이와 충돌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내일은 화내지 말고 아이의 마음을 한 번 더 살펴줘야지, 말로 잘 설명해줘야지, 다짐해도 아이와 종일 붙어 있다 보면 연일 치솟는 폭염처럼 내 다짐은 금세 형체 없이 녹아버렸다. 마음을 지키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울까. 내 다짐은 왜 이리 짧고 얄팍할까. 아이를 보고 있으면 미안함과 짠한 마음, 답답함이 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한데 뒤섞였다.


서른 해를 넘게 살아왔어도 아직도 미숙하다. 누군가 보기엔 까마득한 어른의 나이 같겠지만 마음을 지키고 다짐을 잃지 않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서른 중반에 서있는 지금 내가 보기에 더 까마득한 나이의 할머니가 되면, 그때쯤엔 마음을 살피는 넉넉함과 그걸 지켜내는 단단함이 좀 생겼으려나. 부디 그런 할머니가 되길 바라지만, 인생의 황혼을 걷는 나이가 되어도 그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한 평생을 살아도 부족하다 느끼는 것이 제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다짐을 기억하는 일 아닐까. 그 다짐을 잊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디뎌 언젠가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마음에 다다라있길 바랄 뿐이다.


어른이라 부를만한 나이가 되어서도 사랑하자는 마음을, 다정하자는 다짐을 지키는 일은 어렵다. 그러니 어린아이에게는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 아이와 종일 함께 있다 보면 자꾸만 잊게 되는 아이의 시간을 엄마인 나는 기억해줘야 한다. 이 정도는 다 알잖아, 이만큼은 해야 하잖아 싶은 순간에도 아이는 여전히 어린아이라는 걸. 그래서 마음이 마음처럼 안될 때가 더 많고 방금 한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게 아이에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세상에 태어난 지 네 해밖에 되지 않은 작고 어린아이에게, 사랑하자는 마음을 다정하자는 다짐을 엄마인 나는 포기하지 말아야지. 언젠가 부드럽고도 단단한 마음으로 아이를 담아 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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