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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그래서 죽는 거야

최진영, 비상문

by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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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를 좋아하시나요. 구의 증명은 익히 들어 유명한 작품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작가에 대해서 어떤지에 대해 묻는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을 생각해 보지 않았고, 대답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뭐랄까 애증의 느낌?


사랑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고 뜻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나와는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결과론적인 또는 어떤 목적성이나 목표는 없는 것이다.


다만 글을 읽는 독자로서 무엇이 좋다, 싫다고 할 수 있는 호불호의 관점은 서술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번 최진영의 작품 비상문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 동생 최신우는 3년 전에 열여덟 살이었고 지금도 열여덟 살이다.

내 동생은 자살했다.
이렇게 말하기는 싫다.
내 동생은 죽었다.
이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동생은 없다.
말 없나? 없다고 할 수 있나?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약속을 위해 먼 곳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마도 한 시간 삼십 분 이상의 길이었고 이 책 한 권쯤이야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이 글은 전체적으로 아주 심오하고 가볍고 무거우며 스쳐 지나가는 듯한 바람의 흔적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글은 주인공이 자신의 남동생의 죽음을 겪으면서 남동생, 다시 말해 최신우의 삶에 대한 행적을 되짚어보는 것에 초점을 둔다.


신우가 죽어서 내 인생이 달라졌는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모르겠다. 신우가 죽지 않은 삶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우습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나는 동생이 자살하지 않은 삶을 살상할 수 없다. 동생이 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어떤 식으로 상상해도 동생은 죽는다. 내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사정하면 동생은 죽지 않겠다고 나를 안심시키고 결국 죽는다. <최신우가 살아있다면>이라는 가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우의 죽음은 단단한 뼈처럼 내 삶에 고정되어 버렸다. 숱한 판단과 선택 틈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말과 행동과 때로는 구원의 문제에서 나는 늘 신우를 생각하고 신경 쓴다. 신우가 살아 있을 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네 인생 살아라, 나는 내 인생 살겠다, 그랬다. 신우는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니까, 인정받으니까, 나보다 훨씬 폼 나게 잘 살 거라고 믿었다.


삶과 죽음의 그 간극, 한 끗 차이. 너무나 얇고 가늘고 그 틈바구니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아주 작은 그 틈, 사이를 들여다본다. 빛이라는 것이 밝게 빛나는 것도 아니고 환한 것도 아닌 들어온다 -라는 느낌만 주는 그 틈으로 신우가 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거야'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가 생겨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동호회나 동창회 같은 것이 아니다. 암묵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모르는 채하고, 살아간다. 아직 죽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우 문제집에 써 있었어. 물리 문제집에.
다시 말해 봐. 나는 신우의 문장을 소리 내어 외웠다.
그게 다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지는 그 말을 몇 번 반복해 중얼거렸다.
그래서 죽진 않았겠지.
내가 말했다.
빛이고 손실이고 그런 것 때문에.
그냥 쓴 거겠지.
……충돌 시간이 길어지면 충격력이……작아진다.
그런 문장 바로 옆에 빛이 어쩌고 써 놓은 거야. 이해가 돼?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당연한 물리 법칙일 뿐이다. 신우는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막힘없이 문제를 풀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크레바스 같은 그 간극, 헛디딘 게 아니다. 신우 스스로 뛰어들었다.


주인공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우냐며 패악을 부리고 싶다고도 하고 자신이 과연 최신우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에 대해 회의하며 스스로를 자조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굉장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하고, 그것은 있음에 의미를 더욱 강하게 한다. (물론 훗날 모든 것이 잊히리라는 것 또한 불변의 사실이지만)


그리고 신우는 죽었다. 왜? 세상에 의미가 없어서. 그런 걸로 죽는다고? 그럴 때, 세상에 의미가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반지의 말을 재차 곱씹는다.


삶이란 사실 너무 별거 아니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대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또는 의미 없음에 대해서 탐구할 때 우리는 얼마나 공허함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가. 하지만 그 두려움을 직접 맞서본, 마주한 사람은 안다. 그것은 죽음 또는 삶일 것이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사는 법이니까.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
반지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살 이유가 없었던 건지도 몰라.
나는 두 문장의 의미를 생각했다.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생각했다.
이유가 필요해? 넌 이유가 있어서 살아?
반지에게 물었다.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유가 중요한 사람들.


그렇게 최신우는 죽었다. 죽었다는 것이 이 세상을 마감했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는 것으로 이것을 마무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신우의 죽음으로 반지와 나의 가치관은, 사상은, 생각은, 앞으로의 지향점에 대한 변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삶에 대한 지리멸렬함을 버티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전망은 앞서 이야기한, 그렇게 죽는 사람들도 있다는 지독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극복하기 위한 맹목적인 정신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니까,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살아보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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