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업계포상 Feb 15. 2017

딸기우유는 지지리도 궁상이었다.

인생, 요 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지금과 달랐다. 키도 작고, 호리호리 말랐으며,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아이였다. 우울하리만치 조용한 지금과는 매치되지 않아 멀게만 보이는 시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건 딸기우유에 대한 사랑이었다.

 딸기우유는 초코만큼 달지도 않았고, 바나나만큼 향긋하지도 않았다. 진짜 딸기라고 칭하기도 어딘가 모자랐다. 하지만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달콤한 그 맛이 내 취향을 저격해버렸다. 흰 우유도, 제티 탄 우유도, 초코우유도, 단지 바나나우유도 아닌 딸기우유만이 내가 사랑하는 우유였다.

 지지리 궁상맞았던 그날도 그랬다. 내가 딸기우유밖에 먹지 않는 걸 아시는 엄마가 학교 가면서 먹으라고 딸기우유를 사주셨다. 나는 딸기우유를 고이 품고 학교로 향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딸기우유를 왜 먹지도 않고 가방에 품어뒀느냐고? 작은 아이에게 소중함이란 그렇게 고이 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먹어 없애기 아까울 정도로 딸기우유를 사랑한 나는 최고의 순간을 딸기우유와 함께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모든 지루함이 끝나는 '하교시간'처럼!

 그러나 어린 날의 나는 지금보다 부주의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풀어놓고, 그대로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딸기우유가 든 가방을! (그때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잠깐만 눈에서 멀어져도 잊어버리는….)


 또 삶이란 당연하게도, 꼭 그런 순간에 사건이 벌어지곤 한다.


 쉬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어린 멧돼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뛰어다녔다. 여기저기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멧돼지들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반장 멧돼지의 돌격이 사물함에 처박혔을 때, 퍽- 나의 사랑이 터져버렸다. 축축한 분홍 피를 뿜어내며. 그 순간 멧돼지들은 모두 알았다. 큰일 났다는 것을. 멧돼지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든 것 없는 가방은 젖어버리고, 몇몇의 눈치 빠른 아이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우유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 위해.

 "너 우유가…."

 순식간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유가 아쉬웠던 걸까? 아니면 엉망으로 젖어버린 가방이 서글펐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엄마가 준 걸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참 서럽게도 울었다. 사실 그 모든 이유 없이도 울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정말 엉망진창 울보였거든. 첫울음의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울음의 이유였다.

 당시 내 우유를 터트린 반장은 착한 아이였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했으며,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갚을 기회를 주길 바랐다. 그래서 말했다.

 “미안해…. 내가 다시 사줄게.”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펑펑 울어재끼는 어린아이를 보고 말했다. 같은 나이인 주제에 꽤나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난 그 말에 더 펑펑 울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운 것은. 친구의 말이 고마워서도, 상대적 어림의 박탈감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우유가 터져버렸다는 이유 따윈 이미 저 하늘 위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럼 뭐 때문에 울었냐고? 그건… 부끄럽게도 그 아이가 우유를 사준다 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다 돈이었거든….

 나에게 돈은 절박한 놈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분식집을 가도 튀김을 두 개 이상 집어먹기가  눈치 보이던 나였다.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노트에 꼭꼭 적으면서도 먹고 싶다는 얘기 한 번 한 적 없던 나였다. 신발 사달라는 말이 어려워 밑창이 다 뜯어진 신발을 신고 다녔으며, 고등학교 교복 맞추는 돈이 부담될까 중학생 때 모아둔 용돈으로 내 교복을 사 입었던 나였다. 대단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아빠가 없는 우리 가족은 엄마가 야근까지 해가며 벌어온 78만 원으로 세 식구가 먹고살았고, 사치는커녕 여유조차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울었다. 사준다니까. 갚아준다니까. 조금만 더 서럽게 울면 정말 사줄 것 같아서. 그래서 울어버렸다. ‘그게 다 돈인데.’ 열 살이 될까 말까 한 어린 시절, 그런 생각이나 하며 울었다. 참 영악한 울음이었다. 결국 내 울음은 선생들의 귀에까지 퍼졌고, 나는 선생님이 쥐어준 딸기우유를 받고서야 울음을 멈췄다. 영악하게 멈췄다. 난 그때 선생님들이 떠들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저게 뭐라고 그렇게 우는 거야?”

 그들은 고작 딸기우유에 펑펑 우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듣도록 불평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자존심도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했지! 다시 딸기우유를 얻어냈으니까. 가방이 젖은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건 돈이 안 드니까. 해프닝은 그렇게 끝났다. 우유를 얻은 나는 여전히 울보였으며, 친구와는 조금쯤 멀어지게 됐다.


 다시 생각해도 지지리 궁상인 날이었다. 아니, 그 당시 우리는 매일이 그랬다.


 엄마는 딸, 아들을 키워내야 했고, 또 그 딸, 아들이 어디 가서 욕먹지 않으려면 그 빌어먹을 놈의 돈이 꼭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들과 떨어지더라도 돈을 벌로 가야만 했고, 우리는 홀로 남은 처지를 원망할 여유조차 없이 서로를 끌어안아야만 했다. 그렇게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도 없이 일하면서 벌어오는 돈이 한 달 78만 원. 최저시급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그렇게 연명했다. 아침 챙겨줄 사람이 없어 물만 밥을 먹었고, 점심 챙겨줄 이가 없어 싸늘한 도시락을 먹었다. 누나와 나는 불 꺼진 복지관에서 별을 세며 엄마를 기다렸으며, 돌아간 집엔 벌레가 제 집인 양 바글거렸다. 우리 집 티브이는 이모가 쓰다가 버릴 것을 받아썼으며, 냉장고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책상은커녕 방도 없었고, 컴퓨터는 무슨 라디오 하나 가지는 게 누나의 소원이었다. 궁상이 싫어 엇나가기도 일쑤, 눈물의 매로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의 나에게 가난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했으며, 가난을 벗어난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빈의 끝자락에 사는 우리는 부를 탐내지도 못했다. 아득히 멀어 노력조차 생각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먹고 싶은 것 못 먹고, 갖고 싶은 것 못 갖고. 하지만 그로부터 약 15년 후는 달랐다. 엄마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셨고, 누나는 바리스타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는 나도 어느새 두 권의 책을 출판하며(정확히는 한 권은 출판과정 중에 있다.) 어설프나마 작가가 되어가고 있다. 작년엔 글쎄 백 원, 이백 원 모으던 돈으로 처음으로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물론 모은 돈 보다 빚진 돈이 많지만, 이사를 상상조차 못 하였던 가족은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에, 비약이 심하다고? 생필품 하나 못 사던 집이 어떻게 이사를 갔냐고? 딸기우유에 울던 찌질이가 어떻게 작가가 됐냐고?  글쎄,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많고, 그간 일어난 일도 무수해 나조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이 인생이란 놈'이라고. 가난의 극에 달해 올라갈 생각도 못하던 아이가 꿈을 이루고, 돈 때문에 학업마저 포기했던 아이가 학사모를 쓰는 것. 그리고 하루에 세 번씩 꼭꼭 챙겨 울던 울보가 눈물보다 웃음이 많아지는 것. 그런 게 인생이지 않을까?


 어쩌면 당신의 지금이 최악일 수도 있다. 난 당신보다 더한 최악이 있느니 떠들며 당신의 고통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당신의 최악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세상은 금방 바뀌고, 꿈틀거리는 삶은 언젠가 변해있다. 지지리도 궁상맞던 내가 그럭저럭 괜찮은 내가 된 것처럼. 당신의 삶도 나아지리라 믿고 있다. 독 같은 나날이 반복된다고 그걸 포기하는 게 옳았다면, 난 지금과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없었을 테니까.




 364일 울더라도, 마지막 하루는 웃을 수 있는 당신을 기대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들의 기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