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업계포상 Mar 07. 2017

딸기 라떼 추도문

의식의 흐름

 코끼리 카페에서 딸기 라떼를 시켰다. 연분홍 색체와 향긋한 딸기향, 시판되는 딸기우유와 똑같은 맛이었다. 그래서 짜게 식었냐고? 아니, 그래서 홀딱 반했다. 천오백 원이면 살 우유를 사천 오백 원이나 내고 만족하는 게 정상이냐고? 이봐이봐, 가치란 돈으로 딱 나눠지지 않는단 말이야.


 우선 이 곳의 우유는 진짜 딸기우유를 사서 갖다 부은 건 아니었다. 얼음 위의 작은 홈에 흰 우유가 고여있었다. 제 나름의 시럽과 우유를 섞은 것이겠지. 그 덕분에 과육도 잔뜩 씹혔다. 시럽에 푹 잠긴 딸기 과육이 말캉말캉 달콤하게. 내가 좋아하는 딸기우유 맛, 미워할 수 없는 식감, 흰 우유의 고소함. 그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음료, 거기다 적당히 따뜻해 집중하기 좋으면서도 잠은 오지 않는 카페의 온도, 널찍한 나무 책상. 먼지가 내려앉았지만 고풍스러운 화분. 모든 것은 그대로 완벽했다.


 이럴 수가! 난 분명 음료를 천천히 즐기는데? 왜 내 딸기 라떼는 벌써 없어진 거야? 어쩐지 달콤한 향이 나더라니…. 양귀비라도 넣은 모양이었다. 한입을 쪽 빨았을 뿐인데, 도무지 멀어질 수가 없었다. 이따 먹어야지… 이따가 먹어야지… 오래도 생각했지만, 한 입은 다음 한 모금을 불렀고, 입에 남은 딸기 과육이라도 씹고 있노라면 그 완성을 위해 또 라떼를 들이켜야만 했다. 요물 같은 놈. 음식을 휘젓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버블티 이후로 처음으로 빨대를 휘두르며 (그때의 내 모습은 가히 조자룡에 비견될 만큼 위풍당당하고 진중했다.) 딸기 조각을 사냥했다. 사냥의 전리품은 피처럼 붉었으며, 또 달았다. 빠드득, 빠드득. 나는 씨앗마저 남기지 않고 부스러기로 만들었다. 그게 내 입에서 으스러져가는 딸기를 위한 예의였다. 예로부터 무장의 도리란, 싸움에 진 패장의 목을 단숨에 쳐주는 것이었다. 어중간한 온정을 발휘해 패전 무장을 살려두는 것은 상대의 명예를 꺾고, 치욕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목숨보다 명예가 무거운 무장들에게 불명예와 치명은 쇠붙이보다 날카로웠고, 검을 잡아도 또 검을 놓아도 지옥뿐인 일생이 이어진 것이다.


 먼지구름이 일고말이 뛰어다니며 쇠붙이가 부딪히던 전장은 현대에 와서는 바뀌었다. 우리는 모래벌판 대신 식탁이 되었고, 우리의 무구는 포크와 나이프 때로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되었다여전히 그 시절의 창과 칼을 닮은 무구였지만, 그때완 다른 전장이었다. 우리는 무예 대신 미각을 탐미하는 무장식탁 위의 전사식탁 위에 올라오는 대적자들은 무수한 맛으로 무장한 음식들그야말로 우리가 베어 넘기고, 씹어 삼켜야 할 적장인 것이다물론 오직 그들을 씹어 삼킨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우린 우리의 이빨로 적을 베어 넘김으로 인해그들의 삶을 추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그가 자라온 환경과그로 말미암은 현재를 곱씹고그의 진정한 맛을 탐미함으로 그의 유지를 잇고, 그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말이 길어졌지만그리하여 입에 들어온 녀석은 씨앗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후회와 반복의 역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만약 내가 지금 이 씨앗을 뱉는다면, 세상에서 세상으로 흘러간 씨앗이 어쩌다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싹을 틔우고 과실을 맺고, 결국 전장(그러니까 식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직 나의 이빨이 충분히 강한 시점에서 씨앗이 돌아온다면, 난 아비에 이어 아들까지 파괴해야 할 것이다. 우리 위대한 식탁의 전사는 식탁 위의 그 누구도 용서한 적 없으니. 하지만 식탁을 내려온 나는 육중한 가책 정도는 느끼게 되겠지. 그러한 가책은 나를 좀먹고, 속에서부터 약하게 나를 갉아먹을 것이다. 또한 내가 그를 씹어 삼킬 수 없도록 충분히 약해진 때라면 나는 그 앞에서 삭은 이빨로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딸기가 씨앗을 남겼든, 나도 자손을 남겼을 것이다. 나의 자손은 내가 씹어 삼키지 못한 녀석들을 작고, 균열하며, 야문 치아로 씹어 부시기 때문이다. 때론 예의를 배울 정도로 자라지 못한 손자들은, 전장의 예우를 알지 못해, 흙먼지 위에 전사를 굴릴 것이고, 대게는 집어던질 것이다. 딸기는 자존심도 명예도 없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 굴레 몇 번 반복된다 하더라도 이미 싸움을 진 자에게 명예는 없다. 복수라는 놈은 성공과 별개로, 이미 상대방에 대한 인정이 결여된 치욕이기 때문이다. 전장의 예를 갖추고 만난 우리 전사들에겐 맞지 않다.


 아뿔싸 우리가 식탁의 예의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딸기 라떼는 이미 동이나 버렸다. 녹아 나오는 얼음물마저 집어삼킨 탓에, 더는 분홍색이 아닌 투명에 가까운 유백색 액체가 잔을 채운다. 여기서 나는, 이 일생에서 처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카페에서 한 잔 더의 음료를 시킬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격정을 한 때의 감정으로 남길 것인가? 머리는 이미 잔고를 확인했다. 거짓말로도 넉넉하다 못할 돈이 떠올랐다. 이 순간 나는 알았다. 내가 오늘 다시 이 음료를 시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간의 고민에 열중했다. 이 순간 치열한 고민이야말로, 딸기 라떼에 대한 사랑의 반증이기 때문이었다. 난 거칠게 자리를 벅차고 일어났다. 당당하게 지갑을 챙겼다. 우람한 등을 쫙 펴고, 카운터로 가서 외친다.

“저기요!”

 앉아 쉬던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어났다.

“따뜻한 물 한잔 주세요!”

 당연하게도, 그날 나는 딸기 라떼를 더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치열한 사투를 여기에 적어, 딸기 라떼를 기리고자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마주친 운동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