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내일이 있나요?
서울은 처음이었다. 중학교 때 학교 수학여행에 끌려 다녀갔던가? 기억에 남는 거라곤 줄이 더럽게 길던 에버랜드밖에 없었다. 뜨거운 태양과 당시 왕따이던 나, 친하지는 않지만 나를 딱하게 보며 챙겨주려던 친구들. 그 모든 게 7월의 사우나 같던 그 날. 그 날을 빼면 서울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사랑하는 연인과 떠난 여행이었으며, 처음으로 내 의지로 떠난 여행이었다. 한 달 내도록 짜놓은 계획은 견고했고, 그녀 몰래 준비한 깜짝이벤트는 완벽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퍽 서러운 광경이었다.
열두시를 조금 넘겼을까? 칠월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얼마 걸치고 있지도 않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할 때였다. 우리는 점심 먹을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고, 열두시를 기점으로 쏟아져 나온 셔츠와 블라우스들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느 틈에 그리도 숨어있었는지, 바글거리는 셔츠의 수는 제법 되었다.
“어쩌지? 우리 밥집가도 자리 없겠다.”
헐빈한 뱃가죽이 그르륵, 들끓었다. 아무리 맛집이라도 줄서는 걸 용납 않는 우리. 의욕은 꺼내놓은 소프트콘처럼 줄줄 녹았다.
“어떡하지?”
“…….”
덩달아 사라진 말 수.
“아, 일단 시원한 거라도 좀 마시자.”
그래, 즐거운 여행인 걸. 우리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공포가 조금도 의미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섯 평이나 될까? 좌르륵 늘어선 물건들 덕에 더 좁아 보이는 편의점. 그 안에 그보다 더 좁은 테이블과 위태로운 바. 그곳에 그들이 바글거렸다. 허연 셔츠 깃 휘날리며.
뭐 지나가는 길에 음료수라도 마시려고 한 거냐고? 점심 전에 목이라도 축이려했던 거냐고? 글쎄,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저마다 라면과 삼각 김밥 혹은 라면과 도시락 등을 들고 서있었다. 두 대밖에 안 되는 전자레인지 앞에 오와 열을 맞춰 다닥다닥. 내가 목이나 축이려는 곳이 그들에겐 식탁이었고, 내가 줄 설까 두려워 도망간 곳에 그들은 이미 줄을 서고 있었다.
왜일까? 후딱 해치우고 조금이라도 쉬려고? 아니면 편의점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정말… 그랬던 걸까? 얼음 컵에 팩으로 된 망고주스 하나 담아오면서도 퍽 시큰했다. 가슴께에서 하얀 불의 고리가 두 바퀴 쯤 쇠고리를 넘은 것 같았다. 하얀 건물에서 새어나온 하얀 콩나물들이, 다시 초록빛 편의점에 꽉꽉 들어차서는, ‘내 월급이 얼마더라?’ 삼각 김밥 주섬주섬 레인지에 데워먹는 모습이. 결코 삼각 김밥을 천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 좁은 식탁이 그들의 선택이었을까?
애써 투레질하며 들어간 식당은 쾌적했다. 지나온 출입문을 돌아볼 뻔 했다. 혹시 셔츠 입은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는 건가하고. 하양이 종말 된 식당 안에는 우리 같은 여행객이나, 노고를 모두 끝낸 분들만이 허하게 들어차 소주 한 잔 곁들이고 있었다. 저 밖의 초록색 네모 안에는 그렇게 바글거리는 데, 그곳은 허했다. 그 허함이 가슴에 남아, 아직도 떨고 있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건만. 그 사람 많은 서울에서, 나름 취직해서 셔츠에 블라우스 곱게 차려입은 그들은 왜 편의점으로 모이게 되었나? 돈이 없어서? 취향이라? 아니, 비단 셔츠 입은 자들만의 얘기도 아니었다. 고단한 택배일 중 잠깐의 점심을 때우는 기사님들도, 숱한 대학생들도, 영업부 청년도, 아버지도 삼촌도 누나도 우리 모두도. 우리는 무엇이 그리 급해 편의점으로 몰려들어야 했는가? 무엇이 그리 궁해 점심을 때워야만 했는가. 분명 누구도 굶지 않는 사회를 이룩했고, 최저생계비는 삶을 영위하는데 문제가 없다는데, 우리는 뭐가 그리도 불안해 그렇게 점심값을 아끼게 됐는가? 왜 당장의 나도 삼각 김밥 값이 아까워 집에서 싸온 땅콩 쪼가리나 씹는가? 나는 분명 저축보다 소비가 행복이라 부르짖던 사람인데. 왜 한 번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있는 거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었다. 가슴 속의 공허는 그대로 남았다. 구조주의자도 개인주의자도 아닌 나는, 구조의 탓도 개인의 탓도 할 생각이 없다. 심리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닌 나는 심상을 파고들어 분석하거나, 사회현상 이면의 의미를 쫓을 수도 없다. 다만 편의점 커스텀 음식을 사치라 부르고, 그 돈을 아껴 누리는 작은 행복, 이를테면 스페셜 티 커피 한 잔이나 굿즈 구매 등을 비웃는 이들이 밉다. 저 작은 편의점 미어터지게 모인 우리들이 서럽다. 폐기할 것도 없이 녹아드는 세모난 김밥 녀석들이 안타깝다.
우리는 어디까지 밀려날까? 같은 처지인 나, 어깨를 두드려줄 한 줌의 희망 가지고 있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부디 그들이 좀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또 나에게 내일이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졸업을 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며, 내일 있는 삶의 무게를 깨닫고 있습니다. 당장 내년의 최저시급으로도 이렇게 뜨거워지는 곳이지만, 저는 그래도 모든 이들이 더 대접받아야 하며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