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문수 Jun 22. 2021

글을 쓴다는 사람이 소재 고갈이라 하여

다시 소재 고갈을 주제로 글을 쓴다면

올 것이 왔다. 


바야흐로 봉착한 것이다. 나는 통감했다. 

쓰는 이로 하여금 최대의 굴욕이며 수치

만약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팔아야 할 물건이 없는 것과도 같고, 

큰불이 났다고 가정했을 때 소화기로 불을 꺼야 하는데 

정작 소화기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은행인데 돈이 한 푼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뿔싸. 


그간 너무 안일했던 탓일까. 

무언가를 새로이 보려 하는 마음을 소홀히 해왔다는 게 이렇게 들통날 줄이야. 

소재 고갈.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 이르렀다. 

해야 할 일에만 눈길을 주었더니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거다. 


일상의 반복과 유지.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면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영혼 없는 상태가 된다. 

사람들이 늘어선 지하철 안에서 나는 선 채로 

정신을 멀쩡히 두지도 못하고 잠들지도 못한다. 

팔을 직각으로 접어 손잡이에 걸고는 

거기에 머리를 기대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이다. 


아, 왜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일어서질 않을까.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앉아있다가 내리는 걸까. 

하필이면 왜 저기 있는 사람이 일어서는 걸까.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나보다도 늦게 지하철에 오른 사람인데. 

아, 집에서 드러눕고 싶다. 

이어폰을 얄구진 거라도 하나 사서 노래를 들어야 할까. 

서서 책을 읽기에는 지하철은 너무 복잡하다. 


요새는 사무실에서 읽던 책을 주말에 집에 가져가도 도통 읽지를 않는단 말이지. 

나태하다. 그러니 이렇게 소재 고갈이 찾아온 게지. 

애석하게도 내 앞에 앉았던 사람은 나와 같은 역에서 하차한다. 

부근에 수많은 회사가 밀집한 그 역에서 사람들은 얽히고 얽힌 채 무더기로 쏟아져버린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내리는데도, 또 그만한 사람들이 

스크린도어 앞에서 지하철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역 바깥으로 나와 사무실을 향해 걸을 때쯤이면, 

하늘은 아침에 나왔을 적과 다른 색을 띠고 있다. 

좀 더 파랗고 하얗다. 바람도 어딘가 다르다. 

사람이 부대끼는 지하철 안에 있다가 나와서 그런가, 

바로 한 시간쯤 뒤에 마시는 공기 역시 보다 상쾌하고 서늘한 맛이 있다. 


장미. 장미가 보인다. 

점심으로 때우기 위해 샐러드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길에 지나는 

무슨무슨 환경연구원이라는 기관의 담벼락에 장미 송이들이 여럿 있다. 

‘때’라고 한다면 지금은 여지없이 5월 말인데 장미는 과연 요맘때 활짝이구나. 

저번주였나. 말끔한 정장에 머리가 희끗하신 분이 

손에 아담한 카메라를 들고 그 장미들을 사진에 담는 걸 보았다. 

카메라에 매달린 줄이 흔들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서 본 남의 집 담벼락에도 

장미 몇 송이가 담을 넘으며 얼굴을 보이고 있었지. 

나도 그분을 따라서 장미 몇을 조용히 사진에 담았다. 

셔터라고는 없는 휴대폰에서는 들리는 찰칵, 셔터음. 

출근하다 말고 멈춰 서서 남의 담벼락을 넘어 다니는 남의 장미를 들여다보는 나. 

조용히라고는 하지만 누군가는 뒤에서 그런 나를 분명 보았을 거다. 내가 그분을 몰래 보았던 것처럼.


내가 샐러드를 사기 위해 들어가는 편의점 역시 이미 정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인사를 건네는 직원. 

샐러드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내가 지나는 루트 역시 늘 그대로인데. 

가끔은 행인1 혹은 행인2가 근처의 삼각김밥이나 도시락을 고르느라 진로방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통로가 좁은 곳을 

굳이 모르는 사람과 스치며 지나가기가 영 마음 편하지 않아 빙 돌아간다. 

초콜릿이나 사탕, 과자 같은 것들이 늘어선 진열대를 돌면 

은은한 냉기와 함께 ‘냉장X냉동’ 코너가 나타난다. 

이어서 아이스크림이나 냉동 식품 따위가 있는 냉장고를 지나면 

각양각색의 소시지, 핫바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는 진열대가 보인다. 

거기엔 순대라고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기다란 소시지가 빙글빙글 말려 비닐팩에 포장되어 있다. 


그런 실없는 시간을 보낸 뒤 비로소 샐러드가 놓인 곳 바로 앞에 선다. 

인기가 별로 없는지 가장 아래쪽에 진열되어 있다. 

샐러드 중에서도 내가 즐겨 먹는 것은 또 정해져 있으니 고르는 건 단숨이다. 

그러나 여전히 행인1 혹은 행인2는 무언가를 고르며 계산대로 가는 통로를 좁히고 있다. 


여기서 모순 등장. 


나는 샐러드를 고르고 계산하러 갈 때에는 

행인1, 2와 스치는 것을 개의치 않고 후루룩 지나가버린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이럴 거면 뭐하러 빙 돌아서 왔지? 

계산을 하고 편의점 밖을 나서면 사무실로 그대로 직행. 

지독하게도 하루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아아악! 악몽, 악몽이다아!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더라. 아 그래, 소재 고갈. 

역시나 무얼 써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도대체 글로 쓸 만한 게 없구나. 

내일은 일요일인고 하니, 산책이라도 나가 볼까.


21. 5. 29. 

작가의 이전글 불행 백신은 어디 없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