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문수 Jun 25. 2021

말과의 약속

인간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선택의 연속. 옳은 것과 그릇된 것. 혹은 나은 것과 덜한 것. 

그러한 선택만큼이나 인간은 또한 살아가면서 무수한 약속을 한다. 


약속이라는 것을 계약의 일종으로 본다면 그것은 분명 구두계약에 국한될 뿐일 거다. 

만약 약속이라 하는 것이 어떠한 증거-예를 들어 각서나 계약서 따위의-를 남긴다면 

그것은 정말로 ‘계약’이 될 테니까. 


그러므로 약속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허술하기 그지없는가. 말로써 이루어지는 약속. 

손을 내거는 것은 그저 시늉에 불과할 뿐.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지!


그래 인간은 사실 무언가를 이룩하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에 더 쾌감을 느끼는 사악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약속의 허술함을 그 약속 자체만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는 약속이 정말로 허술한 이유는, 

약속을 이루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 더욱이 허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미 오래전부터 말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마음이라는 것이 소리나 몸짓(수화 등)을 가지면 말이 되고, 활자를 가지면 글이 되는 것인데. 

인간은 마음이 없는 말을 발명해냈다. 더는 마음을 담은 말만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음이란 어떠한가. 

우리 몸뚱어리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관으로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지 않던가. 

우리는 그 힘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알고 있다. 

거울 안에 가득 찬 우리의 모습을 한낱 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과연 마음이지 않은가. 

그렇듯, 역시나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말이라는 것은 또 어떠한가. 

한때 ‘마음의 소리’라고 불리던 말도 그 마음을 닮아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말은 마음보다 훨씬 위험하다. 

마음이라는 것은 나의 세상만을 지배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타인의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구름 위로 치솟게 만들기도, 

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기도 하니까. 


마음이 ‘화살’이라고 한다면, 말은 ‘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을 담은 말만 내뱉었던 시대에는 그 ‘위험한’ 화살의 수가 아주 한정적이었다. 

그만큼 마음을 전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이 마음을 담지 않아도 되는 말을 발명해낸 순간부터 

세상에는 화살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베이고 뚫리고 목숨을 잃어버린다. 

말은 진정 사람을 죽일 만한 힘이 있다. 

그러나 누굴 죽일지도 모르는 그런 말을 ‘난사’한다. 

말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가.


진심을 담은 말만 내뱉는다면 해결이 되노라고 간단히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참 많이도 보았다. 많은 사람이 본인 삶에조차 진심을 담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을. 

인간은 말과의 약속을 저버리기도 전에 이미 마음과의 약속을 저버렸는지도 모른다. 

화살이 쏟아지기도 전에 시체가 쏟아진다. 껍데기들의 세상. 껍데기들의 나라.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고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하며,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에 책임지지도 않는다. 

세상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너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쏟아졌을 때 주워 담을 수 있는 건 우리들 자신뿐이지. 


우리는 누굴 믿으며 살아가지? 

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 스승? 아이돌? 유튜버? 

얼마나 믿어야 하고, 또 얼마나 속아야 하지? 어째서 자신마저 속이는 짓을 하는 거야. 


하긴, 전부 받아들이기엔 삶이 너무 가혹하지.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도,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도 너무 많아. 

사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닌데. 커다랗지도 깊지도 않은데. 

세상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자꾸만 절제하라고 강요해. 


내 진심은 오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는 거야. 나태해지고 싶은 거야. 

돈이고 뭐고 다 지겨워 죽겠어. 잘되지도 않는 일도 다 그만두고 싶어져. 

하지만 또 그럴 능력은 안 되지. 그래 맞아. 부족한 사람이 더 움직일 수밖에. 

유능하지 못한 것을 탓해야지. 좋아하더라도 돈 안 되는 일은 할 수 없는걸. 

솔직해서 뭐하겠어. 솔직해져봐야 더 비참해질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속는 사람이 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다들 속는 거지. 


속는 셈 치고 좀 멀쩡해지려는 거지.          


21. 6. 5.

작가의 이전글 가면을 모으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