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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Mar 07. 2021

언어의 왕도

<장조림: 꽃 없이 내려온 프로메테우스> 16

말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니, 늘 한다.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뛰어난 말솜씨가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다. 나는 그 힘이 말솜씨에서 나온다고 믿는 듯하다.

그들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뽐내는 실력과는 별개로 말이다.


사람에겐 무언가를 혼자 해내는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너르고 완만할수록 바람직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것도 참 어렵다. 어떤 관계에 있어서,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단순한 지인이든 간에,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다면 감정도 대화도 만남도 없다.

그 믿음을 보여주기 가장 쉬운 방법이 말솜씨 같다.

심히 어눌한 말투를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뭔지 모를 답답함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말솜씨라는 건 어떻게 갈고닦을 수 있는 걸까.


나 역시 그런 말솜씨를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다.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가게 되면,

늘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머릿속은 전쟁통이다.

이야기하면 좋을 것들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불쑥 찾아오는 침묵이 내겐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걸 견디지 못한다. 정-적. 그게 찾아오면 소변을 오래 참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참 견디기 어려운 모습이다. 하지만 내 말솜씨도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한들 밑천은 금방 드러난다.


평소에 어디 대화할 상대가 없어 이가 근질근질하다면 누굴 만나든 이야기보따리를 풀 수 있겠다.

내 경우엔 글쓰기로 평소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서 다 꺼내놓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면 말할 이야기가 적다.

아직 글로 쓰지 않은 이야기와 앞으로도 글로 쓸 일 없는 이야기 중에서 골라내야 한다.

글로 써버린 건 대부분 머릿속에서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금방 잊어버리거나 한동안 까먹고 있는다.


하지만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을 보면 굳이 자기 이야기를 많이 꺼내지 않아도 편안한 대화로 이끈다.

언어의 왕도라는 것에 대화 소재의 축적량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담 뭣이 중헌디?


장강명 작가의 산문집 『책, 이게 뭐라고』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다.

작가 본인이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말귀를 너무나도 못 알아먹었더라는 거다.

그 이유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 때, 그 사람들의 목소리나 말투, 표정, 몸짓 같은 것들에

하나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목이 내 가슴에 불꽃놀이를 터뜨렸다.

화려한 불꽃놀이 뒤에 불어오는, 옅으면서도 불길한 화약 냄새를 맡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그동안 그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내 이야기를 할 때는 탁자를 내려다보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마주 앉은 누군가가 이야기할 때면,

그 이야기 자체에서만 그 사람의 기분이나 의도를 헤아리려고 했다. 엄청나게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아무리 뛰어난들, 우리의 마음과 얼굴, 몸짓을 뛰어넘을 순 없다는 걸.

나를 믿고 있는 사람이 보내는 눈빛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기보다는, 마주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자기 생각과 감정을 잇는 걸 잘했다.

그것이야말로 대화의 본질이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감정과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말을 잘한다는 건 언어구사력이 훌륭하다는 것보다도,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의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말솜씨가 어수룩하고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느끼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동안 누군가가 말하면 그의 이야기 말고는 다른 걸 신경 쓰지도 않았고,

내가 이야기할 때는 마주 앉은 사람에게 내 표정이나 몸짓 같은 것들을 잘 내어주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의 이야기에 적절한 내 감정과 생각을 잇지 못하고,

그 역시 내 이야기에 적절한 감정과 생각을 잇지를 못했던 거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대화라는 걸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들어야 하는 걸 읽어내려고만 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면 '듣기'라는 것에 온 신경을 쓰기로 했다.


바람직한 대화에 대하여 나는 이제야 첫걸음을 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에 대해선 수없이 공부했지만, 대화에 대해선 터무니없이 공부가 부족했다.

텃밭만 한 인간관계를 가진 것도 이해가 간다. 이미 떠나간 이들을 돌아오게 할 말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이어지지 못할 관계였다.

앞으로 만날 이들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려 한다. 다시 되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다.


왕도라는 건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니까.

     

21.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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