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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Mar 09. 2021

여자친구의 수제 초콜릿과 어머니

"초콜릿에 대한 아픈 상처가 있어서."

어느 밸런타인데이 무렵이었다. 형이 여자친구로부터 수제 초콜릿을 선물 받았다.

하나하나가 정사각형에 겉면이 초코파우더로 덮여있었고 식감도 쫀득쫀득했다.

로이스 초콜릿과 정말 비슷했다. 곧 내 마음속에선 그 초콜릿의 유혹과,

형이 여자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양심이 불티 날리도록 싸우기 시작했다.

초콜릿이 남아 있는 개수를 가늠하면서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아주 깊이 고민했다.

일단 하나 더 먹어본 뒤에 개수가 어떤 속도로 줄어드는지 기다려봤다.

이튿날, 모레가 되어도 초콜릿은 줄지 않았다. 초콜릿은 넉넉했다.

내가 하루에 1개씩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었다. 문제는 내가 하루에 2개를 먹는 날이 있었다는 거다.

넉넉했던 초콜릿은 금방 줄어들었고 나는 당분간 손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어머니도 그 초콜릿을 좋아했다.


내가 하프타임을 갖는 사이에 어머니가 조금씩 초콜릿을 먹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초콜릿 개수는 형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남았었다. 마침내 일고여덟 개 정도가 남았을 때,

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형이 초콜릿을 먹는지 안 먹는지 지켜보았다.

6개, 5개가 되었을 때도 형은 초콜릿을 먹지 않았다.

이미 형이 선물 받은 날로부터 거의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나만의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4개. 또 하루가 지나도 초콜릿은 줄지 않았다.

3개. 형은 초콜릿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남은 초콜릿 3개를 홀라당 다 먹어버렸다.


동심을 되찾게 해줄 정도로 달콤한 맛이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초콜릿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사건은 그때부터였다. 


형이 퇴근하고 돌아와서 초콜릿을 찾았다. 수제 초콜릿은 이미 빈 상자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형은 초콜릿을 다 먹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방문을 닫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연달아 초콜릿을 다 먹었느냐고 묻는 형에게

어머니는 자기가 맛있어서 먹었다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덧붙이셨다.

형은 화를 냈다.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걸 다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어머니는 거실에 앉아서 미안하다고, 맛있어서 먹었다고 그러셨다.

하지만 형은 화를 삭이지 못했다. 그걸 왜 다 먹느냐고 그랬다.

어머니는 또 미안하다고 그러셨다. 이놈의 방문은 방음이 정말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 컴퓨터 너머의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묻는 말이 들렸다.


“울어?”

“……초콜릿 먹는다고 구박해서……”


속이 들끓었다. 형을 향한 화가 불붙었다.

그깟 초콜릿이 뭐라고 어머니에게 그렇게 면박을 주나.

여자친구에게 받은 것을 가족이 맛있게 먹어주면 오히려 기뻐할 일이 아닌가.

우리는 그깟 초콜릿보다 뒷전이란 말인가. 형은 결국 방에서 나와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네 엄마 울어!”라며 집이 떠나가라 말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족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부모와 자식이란 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형은 어머니에게 초콜릿도 양보할 수 없단 말인가.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된 줄만 알았다.


그 뒤로 한참 뒤인 바로 며칠 전에,

어머니는 ‘삐에스몽테’라는 동네에서 가장 커다란 빵집을 다녀오셨다.

거기서 직사각형 상자에 든 초콜릿을 사셨는데,

형이 어머니에게 초콜릿은 웬일로 사왔느냐는 물음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초콜릿에 대한 아픈 상처가 있어서. 초콜릿 먹는다고 구박해서.”

가슴이 철렁거렸다.

새삼 어머니의 뛰어난 기억력에 더불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머니는 자식에게 받은 모든 상처를 기억하고 있겠구나.

형이 준 상처, 그리고 내가 준 상처.




명절 이후 또 찾아온 연휴 마지막 날에, 나는 여태 건드리지 않았던 그 초콜릿 상자를 열어보았다.

6개들이 상자 안에는 3개의 초콜릿이 남아 있었다. 형이 먹었는지 어머니가 먹었는지는 모른다.

나도 하나 집어 먹었다. 고급 초콜릿이라면 으레 그렇듯,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살짝 쌉싸래한 맛이 그 밑에서부터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 깊이를 더했다.

며칠 냉장고에 있어서 그런지 단단해서 잘 깨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겉면은 내 체온에 금세 녹아내렸다.


어머니는 이 초콜릿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21.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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