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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문수 Jun 04. 2021

5월 첫날은 밭농사

니 찔레는 무봤나

새벽부터 아버지의 우렁찬 통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 비가 오니 일을 안 한다는 통지를 하기 위해 

새벽 다섯 시 언저리부터 전화를 돌리셨던 거다. 


나는 고대하던 황금 같은 주말에 느닷없이 밭농사를 하러 갈 처지가 되어 상심했었는데, 

비가 온다고 하니 불쑥 희망이 생겼다. 비가 오면 농삿일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신실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빗줄기는 곧 가늘어지더니 그치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렇게 시골로 내려가기 위해 아침 일곱 시부터 씻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가 형이 배가 아프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부터 갑자기 아팠다면서 아무래도 맹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그랬다. 

시골로 내려가기 전에 형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아버지와 어머니, 나 이렇게 셋이서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이미 막내 삼촌 내외가 와 계셨고, 

할머니 댁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거기엔 갓 잡은 싱싱한 낙지 여러 마리가 하얀 스티로폼 안에 담겨있었다. 

볼일을 본 뒤 화장실에 낙지가 있다며 말을 꺼내니 어머니가 곧바로 데쳐서 먹었다. 

짭조름해서 초장 없이도 맛있었다.


바야흐로 고추 심기가 시작됐다. 

나는 고추를 심기 전에 밭이랑에 

까맣고 반들반들한 농사용 비닐을 덮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두루마리로 된 비닐을 소처럼 끌면 

막내 삼촌이 삽으로 흙을 퍼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덮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새벽에 비가 왔던 참이라 장화 신은 발이 흙에 푹푹 빠지는 거다. 


뒷걸음질로 비닐 두루마리를 끄는 동안 장화가 흙을 한 번 빠졌다가 나오면, 

흙덩이를 온통 뒤집어써 확 무거워지는 게 아닌가. 그래도 일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늘이 맑게 개었고 바람도 시원했다. 

시골 공기의 상쾌함에 몸은 힘들어도 기분은 좋았다. 

밭이랑 한 줄에 비닐을 덮으면 막내 삼촌과 나는 잠깐의 휴식을 가졌는데, 

삼촌이 갑자기 어느 풀밭 속을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따 내게 건넸다. 


“우리 김남수 씨 하나 줘야지.”


시골에서 푸르른 것들이라면 내게는 그저 다 똑같은 풀로만 보이는데, 

막내 삼촌은 그중에서 무언가를 알아보고는 

풀밭에 들어갔다가 손에 하나씩 들고 나오셨다. 


처음 건네받은 것은 찔레였다. 

내가 뭐냐고 물으니 삼촌은 목마를 때 먹으면 좋다고 그러셨다. 

푸른 줄기에 장미처럼 가시가 돋아난 그것을 껍질을 잘 벗겨 깨물면 

상추처럼 아삭한 식감과 단물이 입안을 감돌았다.


다시 삼촌과 나의 팀워크가 시작되었다. 

또 한 줄 밭이랑을 덮고 나자 삼촌이 그 옆 풀밭에 가시더니 무언가를 뜯어 내게 건네셨다. 


이번엔 더덕이었다. 


더덕이라 하면 여태 하얀 뿌리만 먹어왔던 터라 그 푸른 줄기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냄새로 보나 맛으로 보나 한 입 깨물어 보니 누가 뭐래도 더덕이 맞았다. 

더덕순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 찔레를 먹었던 것처럼 상쾌한 느낌에 갈증도 나아졌다. 


그렇게 한 아침 10시 40분 정도 되었나. 

우리 가족 네 명이 있는 카톡방에 형이 말하기를, 

맹장 때문에 오늘 오후나 내일 수술을 해야 한단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올 수 없다고 한다. 

그간 하던 일이 힘들다 버릇처럼 말하던 형이었는데, 몸에도 병이 생길 정도였나 보다.


고추를 다 심고 나서 밭에서 돌아왔는데 

다음에는 할머니 댁 바로 앞에 있는 밭에 청양고추를 심어야 했다. 

이번에는 모판에서 고추 모종을 꺼내 

아버지가 밭이랑에 뚫어 놓은 구멍에 쏙쏙 넣는 일을 했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는 양이라 금방 끝났다. 그러고 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원래는 칼국수를 먹으려 했는데 칼국수집이 영업을 안 해 중국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짜장면을 먹었더니 입맛이 돌았다. 

다 먹고 다시 할머니 댁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할머니가 갑자기 그러시는 거다. 


“고추 더 사다 심어야겠는데?”


하여간 기운도 좋으셔라. 

여태 고추 모종을 500개 정도 심어놓고도 결국 고추 모종을 더 사게 되었고, 

누가 도맡아 밭에 심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돌아와서는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둘이서 전을 부치셨다. 

동그랑땡과 산적을 몇 개 집어 먹어보니 참으로 별미였다. 

그러나 짜장면을 먹고 아직 배가 다 꺼지질 않아 금방 그만두었다. 

한바탕 지나가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오늘은 제사도 있어서 아무래도 저녁이 되어야 집에 돌아갈 듯하다. 

사촌들도 한 명도 안 와 홀로 시간을 때워야 하는 나는 

책 한 권과 단둘이 오붓하게 보내야만 한다. 

밭농사를 한 탓에 몸은 천근만근. 오늘은 분명 단잠을 자겠지. 

다음에 농삿일을 한다 하면 오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오후 네 시쯤이 되어서 형에게 메시지가 왔다. 

보아하니 맹장 수술을 했는데 잘 끝난 것 같다. 형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욕봤다.”


형도 나도 참으로 욕본 날이었다.     


21.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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