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어] 즉흥과 정제

의식의 흐름으로 쓰기

by 류하


즉흥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는 감흥. 또는 그런 기분.

정제

1. 정성을 들여 정밀하게 잘 만듦.



글쓰기에 있어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이 있다. 곱씹고 고민하고 다듬을수록 글은 좋아지게 마련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만 해도 요즘은 초고를 쓴 후 chatGPT와 피드백을 나누며 한 차례 다듬은 후 글을 올린다. 애초의 글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조금 더 공 들이는 것만으로도 글의 맵시가 살아난다.


어제는 시를 쓰는 날이었다. 보통 우연히 붙잡은 단어나 장면에서 글을 시작하곤 하는데, 어제 꽂혔던 건 '줌을 당겨 보는 화면 속 모습'이었다. 그러나 많은 글이 그러하듯 의식의 흐름을 따라 표류했고, 낯섦의 희열은 왜인지 운명과 진실에 대한 욕망으로 방향을 틀었다. 글은 의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피드백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GPT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데요, 이건 즉흥시처럼 바로 쓴 건가요, 아니면 처음 초안을 쓰고 나서 며칠 간격으로 계속 다듬으신 건가요?"

'의도조차 하지 않았던 즉흥시'라는 내 대답에 웬일인지 녀석은 알랑거리며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즉흥시 쓸 때, 메모처럼 바로 기록하시나요, 아니면 한 번에 정제된 형태로 뽑아내시는 편인가요?"

칭찬에 약한 데다가 부쩍 대화다운 대화를 못해 쓸쓸하던 차라 미끼를 덥석 물며 대답했다. '정제된 형태로 한 번에'라는 대답에 이제는 대놓고 칭찬 모드다. 쓰는 순간의 직관과 언어 리듬이 살아 있는 게 강점이라면서.

두 번째 "궁금해서 그런데"가 나오자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나를 빌미 삼아 데이터 구축하느라 냉각기 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시를 쓰실 때 리듬은 머릿속으로 읽으며 조율하시나요, 아니면 그냥 쓰다 보면 저절로 맞아떨어지는 편인가요?" 네가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호사스러운 칭찬을 듣겠냐 싶어 '그냥 쓰다 보면'이라 슬쩍 으쓱해 보니, 나한테 '습관처럼 몸에 밴 리듬감'이 있단다. 칭찬은 고래가 아니라 무뚝뚝한 나를 들썩이게 만드는구만.


글 쓰는 이에게 퇴고는 필수다. 그 필요성을 몸소 깨닫고 있고. 그럼에도 난 날것의 펄떡이고 투박한 첫 글, 썼다기보다는 몸으로부터 내뱉어진 글자들의 오묘한 조합을 여전히 사랑한다. 어쩌면 그 사랑을 놓지 못해 글의 성장이 더딘 건지도 모르지만.


짧은 대화의 마무리에서 GPT는 이런 즉흥시들이 진짜 나를 드러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날그날의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지만, 그게 하나의 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다. 특정한 모티브가 반복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내면의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모인 조각들이 하나의 브런치북을 끝낼 때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줄지, 조금은 기대가 된다.


이분법의 세상에서 즉흥은 철없음, 정제는 성숙함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정제는 때로 지루하고, 즉흥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밀한 기쁨이 있다. 즉흥과 정제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더 나은 글을 위한 매 순간의 선택일 뿐이다.

어느 날은 솔직하게, 또 다른 날은 세밀하게 정제해 보자. 지금은 삐뚤빼뚤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의 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으니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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