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어] 난감하다

by 류하


난감하다

2. 맞부딪쳐 견디어 내거나 해결하기가 어렵다.




단어 그대로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다. 오전부터 흰 화면창을 열어놓고 멍하니 보다 쓰다 지웠다 새로 시작했다를 반복한 끝에 결국 지금 시간 밤 열 시 오십사 분, 다시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오늘 하루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떤 단어도 긴 사유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했다. 오늘을 어영부영 넘기면 이대로 이 브런치북은 문을 닫겠다 싶어 쓰지 못함에 대해서라도 써야겠다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이상하기도 하지. 시의 형식을 빌릴 때는 술술 나오던 문장들이 파업이라도 하는 듯 자음의 끄트머리 하나 내보이질 않는다. 한 문장 쓰기조차 어렵다는 사람들의 말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요즘이다. 왜 어떤 글은 가능한데, 어떤 글은 이토록 뱉어내기가 힘들단 말인가. 시의 형식은 압축적이다. 모호한 단어 뒤에서 글쓴이는 마음껏 숨고 변명하고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산문의 형식은 다르다. 말을 덧붙이다 보면 하려던 말은 어느새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딴소리하는 나를 발견한다. 접속사와 논리적 관계로 엮인 문장들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앗아가 버린다. 하나의 글을 주춧돌 삼아 생각이 널뛰기하는 게 아니라 글 자체가 감옥이 되어, 쓰는 사람을 글 속에 묶어버린다.


아주 간절하게, 나는 나의 취약성과 떳떳하지 못함을 숨기고 싶은 모양이다. 길게 뻗어나간 어느 한 문장에서 나도 모르는 새 형편없는 나를 드러낼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매끄럽고 단박에 이해되는 글 대신, 그럴싸해 보이게 그러나 실상은 엉성하게 포장된 글을 쥐어짜 내고 있다.


부득불 글자수를 불려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가.


어린 시절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최근에 다시 읽었다. 누구에게도 속시원히 사연을 털어놓지도 않고, 얼핏 보기엔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어떠한 보상도 없이 반복하는 좀머 씨. 나는 여전히 좀머 씨가 어째서 그렇게 하루 온종일 걸어 다니는지 모른다. 그저 그것만이 좀머 씨에게 필요했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는 이해를 바라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세상엔 설명이 필요치 않은 일이,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세상은 불가해한 곳이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를 껴안은 채 살아간다. 상대가 '나'라 해서 다를 바 없다.


내 안에는 나를 부당하고도 격렬하게 비난하는 아주 오래된 자아가 있다. 그 존재를 알게 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이름조차 없는 녀석. 오랜 상담 과정에서 표면으로 드러난 녀석은 잠잠할 만하면 고개를 쳐들고 마음속을 휘젓는다.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나를 스스럼없이 공격하는 존재. 수없이 '왜?'를 물었지만 기억을 헤집고 다닌들 왜 그래야 하는지 단서의 지푸라기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글을 쓰던 중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방법은 틀렸지만 너도 애쓰고 있구나, 애써왔구나.'라고 인정부터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이지 난감하다. 어쩌다 쓰지 못함의 난감함은 끝맺지 못하는 난감함이 되었나. 자정은 가까워오고 눈꺼풀은 닫히고 있고, 마무리는 요원하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나의 비난자와 애증 어린 일화는 좀 미뤄둬야겠다.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일 테니까. 일단 이름부터 고민해 보는 걸로.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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