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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5. 예은의 서랍

by EON


저자 박예은


29세의 여성. 서랍 3의 저자 정희수와 같은 인디밴드 해방의 일원이다.

밴드녀이지만 의외로 단색의 패션과 수수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녀는

해방의 랩퍼이자 작사가로 해방의 모든 곡을 작사하고 있다.

밴드에게 인디차트 정상을 차지하게 한 ' 합리화'로 작사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합리화를 포함해 그녀가 작사한 유명한 곡들이 이 프로젝트에 다섯 번째 서랍에 실리게 되었다.



(1). 방


나는 문을 열어 방안을 들여다봤어

그 방은 비어 있었네

빈 방에 실망한 나는 문을 닫아 버렸어

그런데 사실 방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거였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거였어


나는 양초에 불을 붙여

그리고 다시 문을 열었네

방안을 비추니 거울이 보여

그 거울 속의 내가 내게 말했네


"넌 날 이길 수 없어"


"왜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나는 문을 닫고 방을 나가 버렸어


내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한번 열었다 다시 닫히면

두 번 다시 열지 못할 거 같기 때문이야


한번 열었다 다시 닫으면

두 번 다시 열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야


문을 열어 다시 방안을 들여다봤어

이번엔 방바닥으로 시선을 돌려

그곳에 무언가 움직이네

촛불을 들어 비춰보니

시커멓고 시리고 상처투성이

아픔과 눈물로 상해있는 존재가 보

그 존재는 슬픈 눈빛으로 날 바라보네

난 화가 나고 짜증 치밀어 올라

문을 쾅 닫아버리지

사실 난 알 수 있었어

그 존재는 내 상처 받은 또 다른 자아란 걸


내 문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한번 열었다 다시 닫히면

두 번 다시 열지 못할 거 같기 때문이야


한번 열었다 다시 닫으면

두 번 다시 열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야


내가 날 혐오하는데 누가 날 존중하길 바랄까

내가 날 납득 안 하는데 누가 날 이해하길 바랄까

내가 날 안아주지 않는데 누가 날 사랑하길 바랄까


이제 그 자아를 안아 줘야 해


그렇게 그 방에 진실한 사랑을

그렇게 그 방에 따스한 빛줄기


내 아픈 자아를 존중할 때

내 닫힌 자아를 이해할 때

내 시린 자아를 안아줄 때


그제서야 보이네


사슬에 풀려난 자아가

어둠에 벗어난 자아가

미소를 띠는 걸


이제 날 사랑하는

지금 날 안아주는





(2). 합리화


그는 검은 박쥐의 꼬리를 붙잡았어

그는 검은 박쥐의 머리를 짓밟았어

증오의 기운을 담아

폭력의 감정을 담아

승리의 염원을 담아

밟고 밟고 또 밟았어


그렇게 짓밟힌 박쥐의 얼굴을 보며

그는 본인이 승리자라 생각했어

(희열감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만족감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그런데

뭉개진 쥐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네

왜?

그의 얼굴이 점점 박쥐의 얼굴로 변해가고 있어서였지

그의 얼굴이 점점 박쥐의 얼굴로 변해가고 있어서였지


박쥐

(희열감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만족감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뜨겁던지 차갑던지

거짓인지 진심인지


이제 하나만 결정해야 해

지금 하나만 선택해야 해


미지근한 게 사실 악이 더 좋아하는 거라네

섞으려는 게 사실 악이 더 조소하는 거라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박쥐의 얼굴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네

(하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네)

(그렇게 이내 미소를 잃지 안 았네)


자신의 얼굴이

검은 박쥐가 아닌 하얀 박쥐로 변해가고 있어서였어

시커먼 색이 아닌 순백의 색으로 변해가고 있어서였어


그는 검은 박쥐를 보며 말했어


"그렇지 난 이딴 더럽고 간교한 쓰레기와

다르지 암 다르고 말고"


뭉개진 검은 박쥐는 그런 그를 비웃듯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네


뜨겁던지 차갑던지

거짓인지 진심인지


이제 하나만 결정해야 해

지금 하나만 선택해야 해


미지근한 게 사실 악이 더 좋아하는 거라네

섞으려는 게 사실 악이 더 조소하는 거라네


박쥐가 날개를 활짝 피네

꼬리를 살랑살랑 거리네

그리고 키득거리며 지껄였어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하지

그래서 난 이 꼬리를 계속 네게 내밀 거야


네가 내 꼬리를 잡아 이겼다 생각하게

네가 내 꼬리를 붙들어 승리했다 굳게 믿게


그리고 언젠가 보게 되겠지


사실

내 뒤를 계속 따라오고 싶어 하는 네 모습을

내 꼬리를 잡기 위함이라 하며 합리화하는 네 모습을"


친구여

이제 눈을 떠야 해

지금 일어나야 해


그 합리화에서 벗어나야 해

박쥐가 여전히 머리 위에 맴돌고 있고?


박쥐는 꼬리가 없다네






(3). 하얀 까마귀


나한테 어떻게 나는 법을

자꾸 강요하려 하지 마

나는 지금 어디로 날아야 할지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한테 어떻게 사는 법을

자꾸 강조하려 하지 마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


누구를 위해 날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사람들이 원하는 내 모습보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되고 싶다


나한테 어떻게 성공하는 법을

자꾸 가르치려 하지 마

나는 지금 무엇이 나인지

알고 싶은 것뿐이니까


나한테 언제나 넌 날개 없다 말하지 마

나는 아직 날개를 피지 않는 거뿐이니까


나한테 검은 까마귀 껍질을 벗겨야

하얀 비둘기가 될 수 있다 하지 마

나는 차라리 하얀 까마귀가 될 테니까


누구를 위해 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사람들이 원하는 내 모습보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되고 싶다


하얀 까마귀 공중에 날개 짓 하네

새로운 빛이 보이네

새로운 길이 보이네

새로운 집이 보이네

미래의 나는 미소를

현재의 너는 조소를


그러니

내 가슴에 더 이상 꼰대 짓 하지 마

내 심장에 더 이상 판사 짓 하지 마

그저 난 내 미소를 지키고 싶으니까


새로운 빛이 보이네

새로운 길이 보이네

새로운 집이 보이네

미래의 나는 환희를

현재의 너는 갸우뚱


누구를 위해 날아가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날아가야 하는가?


사람들이 원하는 내 모습보다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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