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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Dec 03. 2021

중년이지만 키스신은 설레요.  

영화'드라이브'리뷰 #.라이언고슬링 설렘주의보 #.의외로스포일러 없음

 나쁜 생활 습관이 있는데, 저녁 먹은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세상 다 무기력해지면서 앞치마까지 두른 채 소파에 앉아 재미없는 예능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는 거다. 그러다 벼랑 끝에 밀린 심정으로 늦은 샤워를 하고 나면 젖은 머리를 핑계 삼아 또 TV 앞에 자리를 잡는다. 남편은 벌써 들어가 잠이 들었지만 나는 그러기 싫다. 그냥 이대로 잠들면 너무 허무하다. 왠지 억울하기도 하다. 주부로 산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 느꼈을 감정이 아닐까...


 며칠 전, 어떤 날처럼 또 허무했다. 젖은 머리로 전해오는 한기를 참으며 리모컨을 손에 쥐고 TV를 지배하듯 채널 1번부터 쭉... 올렸다. 마치 TV를 지배하듯 속도감 있게 후루룩! 그러다 어떤 채널에서 딱 멈추고 말았다. 영화 전문채널인데, 라이언 고슬링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운전을 하고 있다. 그가 흘끔 나를 보는 듯한 느낌.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배우는 아닌데, 왜 이렇게 따뜻하지? 아련하지? 거기다 환상적인 느낌의 OST가 잔뜩 허무했던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단 몇 초 만에 나를 사로잡은 이 영화의 제목은 '드라이브'. 2011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데 왜 일면식도 없는 거지? 그래도 라이언 고슬링이 나온 영화가 깐느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받았다면 분명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한두 번은 들어봤을 텐데, 왜 이제야 만난 거지? 혹시 온 우주가 힘을 합쳐 숨겨둔 건가? 2021년 어느 겨울밤, 지독하게 허무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럴 리 없겠지만, 그렇다고 믿고 싶게 인상 깊은 만남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덕통 사고.



 LA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주인공 라이언 고슬링은 영화 촬영장의 운전 스턴트맨이다. 그는 능동적 악인이라기보다는 범죄에 살짝 가담만 하는 정도의 악인인데, 옆 집에 사는 햇빛 같은 엄마와 아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점점 진짜 악인이 되어 간다. 하지만 그런 그를 더 응원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어찌 보면 익숙하다. 원빈의 '아저씨'같기도 하고, 마틸다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레옹'같기도 하다. 외로움이 뭔지도 모른 채 지독하게 외로운 남자.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한 듯 외로운 어깨는 왜 그렇게 또 웅장한지. 불도 안 켜진 그의 방에는 자동차 부품처럼 보이는 쇳덩어리 하나 달랑 놓여있다. 그는 그걸 조이고 풀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너무너무 쓸쓸한데... 그 모습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촉촉하게 하는 거야 엉엉엉. 이 영화 대체 언제 끝나는 건가 리모컨을 눌러 확인하니 다음 날 1시 50분. 시계를 보니 자정이 지나 이미 다음 날이다. 볼까 말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미 내 결정은 활을 떠난 화살촉. 이미 꽂히고 말았다. 


 솔직히 '라라 랜드', '노트북' 이야기를 하며 라이언 고슬링 멋지다! 멋지다! 이구동성 외쳐도 솔직히 난 그저 그랬다. 남자라면 좀 더 각진 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해리포터에 나오는 말포이 느낌이 나는 그의 금발과 가르마에서 풍기는 소년 미도 매력을 반감시키는 이유였다. 게다가 영화 '노트북'에서 보여준 그의 그 덥수룩한 수염. 그건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뭐야? 그래도 로맨스 영화인데 남자 주인공한테 털북숭이 수염은  너무한 거 아니야? 그 수염 때문에 왠지 몰입 못했던 순간도 생각났다. (물론 영화가 끝나고 나는 펑펑 울며 중요한 건 수염이 아니었어! 반성도 했다) 하지만 영화'드라이브'의 라이언 고슬링의 모습은 완벽했다. 옷도 몇 번 갈아입지 않고, 세수도 샤워도 하지 않은 듯한 더러운 상태였지만, 왜 이렇게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거야! 말포이 금발도 가르마도 여전한데...   


 이 영화는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 불린다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갑자기 로맨스 영화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어봤어요!라고 하듯 피가 낭자하는 장면들이 많다. 진짜 장난 아니다. 그날 밤 TV로 본 장면들은 살짝 뭉개져 있어 그 잔혹함이 많이 가려져 있었지만, 다음 날 도대체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가 궁금해 왓챠에서 이 영화를 찾아 그날 보지 못 본 앞부분을 보다가 결국 끝까지 다시 보고 말았는데 완전 피칠갑의 향연인 거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함께 순간들은 따스한 햇살 속에서 천천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특히 황홀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영화의 OST 'A Real Hero'가 흐르던 장면, 햇살 가득한 호숫가에서의 한 때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진다. 빛과 어둠, 따듯함과 쓸쓸함, 피칠갑과 포근한 미소... 이 상반된 것들이 이렇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완전히 상반된 분위기와 색깔이 서로를 더 선명하게 받쳐주는 느낌. 천천히 따듯하다가 피가 낭자할 때 휘몰아치는 속도감에 정신이 다 아찔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허무한 중년 아줌마를 사로잡은 장면은 바로 키스신이다. 거의 반 백 년 살아온 인생 동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키스신을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키스신은 처음이다. 단연코 최고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환상인지 현실인지도 불분명하게 천천히 흘러간 그 장면... 우리나라 드라마 키스신 보면 왜들 그렇게 여배우 뒷목을 붙잡는지 원래 그렇게 하는 건가? 나도 첫 키스라는 걸 해봤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흠흠  어쨌든 나는 왠지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글로벌 키스 장인 라이언 고슬링은 달랐다. 거대한 어깨와 함께 보여줄 듯 안 보여 줄 듯 천천히. 삶의 무게의 지쳐 꺾이고 구부러진 그녀의 척추를 일으키는 흡입력(?)! 이래서 라이언 고슬링, 라이언 고슬링 하는구나! 왜 그가 '라라 랜드'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노트북'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지 그냥 다 이해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공유님은 이 영화를 보셨을까? 뜬금없이 발동한 나의 이 징글징글한 오지랖에 피식 웃고 나니 조금 있다가 영화가 끝났다. 마지막 장면, 모든 일(스포일러는 없다!)을 완수하고 어두 컴컴한 밤길을 운전하는 라이언 고슬링. 그녀와 함께 할 때마다 햇살과 함께 흘렀던 바로 그 OST 'A Real Hero'.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나오기 전 갑자기 화면에 뛰어드는 노란빛 하나... 그래, 난 믿고 싶어 이 영화 해피엔딩이라고!   



 중년 아줌마가 주책없긴 한데, 문득 남편과의 첫 키스가 떠올랐다. 그래,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에게 정말 예쁘게 보이고 싶어 셀룰라이트를 제거해준다는 크림으로 몇 날 며칠을 종아리 마시지를 하고 제법 성과가 느껴진 어느 날, 처음으로 짧은 원피스를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사랑에 눈이 멀고 우리는 싸웠다 화해했다 기절할 듯 울었다 절절하게 행복했다, 난리법석을 떨다 결국 결혼이라는 걸 했는데, 이제 20년을 살다 보니 키스고 나발이고 설거지 한 번 해줬으면, 내 말에 다정하게 공감 한번 해줬으면, 음식물 쓰레기 좀 버려줬으면... 싶다!  


 다행이다. 분명 허무한 밤이었는데 라이언 고슬링의 피칠갑과 햇살이 공존하는 영화 '드라이브'를 보고 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꽉 차오른다. 예술의 힘을 느낀 걸까? 아리스토 텔레스가 언급한 바로 그 카타르시스! 비극의 끝을 보고 나니 정말 응어리진 내 마음이 정화된 기분이 든다. 지금도 들리는 듯한 'A Real Human Being and a Real Hero'. 어느새 젖은 머리가 마르고, 밤은 새벽을 향해 달려간다. 더 늦기 전에 자야겠다.     

"오빠... 자?" 




영화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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