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생일 풍경
남편의 취향을 존중하는 편이다. 야구와 판타지 소설에 진심이고, 고기를 배부르게 먹는 걸 엄청 좋아한다.
고기를 먹을 때 그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내장지방 문제는 일단 제쳐둔다.
그리고 새로운 이슈에 대한 지식 선점에 진심이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이라 그럴듯하게 표현을 했지만 쉽게 말해 아는 척하길 좋아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블록체인이 뭐야?"
"양자 역학이 뭐야?"
TV나 신문, 이렇게 저렇게 귀동냥을 들은 이야기 중 모르는 게 생기면 검색을 하기보다 남편에게 물어본다.
남편은 자기가 우리 집 AI '아리'냐며 투덜대지만 나는 안다. 남편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지식 설명에 대한 욕망을!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
문제는 설명이 길고 서론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면 엄청난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가끔 식탁에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남편의 설명이 시작되는 순간을 만난다. 적어도 본인의 라테 스토리 같은 건 아니니 일단 시작하면 들어주지만 설명이 점점 길어지고 지지부진한 전개가 이어지면
나도 두 딸도 봐주지 않고 빨리빨리 본론부터 말하라며 재촉한다.
남편은 한숨을 한 번 내 쉬며(힘을 내는 건가? 화를 참는 건가?) 알았다고 본론을 말하겠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 왜 자기가 그런 긴 서론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됐는지를 또 설명한다.
결국 두 딸과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본론도 말하지 못한 채 숟가락을 내려놓는 남편을 보면 좀 안 됐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막상 내가 널 반드시 가르쳐 이해를 시키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남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반항심이 올라온다.
남편이 나에게 윤하의 노래 '사건의 지평선' 얘기를 꺼낸 건 벌써 오래전 일이다.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그 노래를 같이 들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매장 입구인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와중에 그 노래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 남편.
"지원아, 블랙홀이 있는데, 사건의 지평선이 그러니까 이벤트 호루라기, 우주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역주행을 했는데 그러니까 과학자가 설명을 했는데 윤하가... "
도대체 뭔 소리야? 대충 들은 척하고 그 노래가 그렇게 좋았냐고 하니 너무 좋다고 한다!
요즘 그 노래만 듣는다며 윤하가 대단한 아티스트라고 한다. 뭐지? 내가 윤하가 부른 에픽 하이 노래 '우산' 좋아할 땐 윤하가 누군지도 몰랐으면서 갑자기 윤하! 윤하! 혼자만 윤하를 안다는 듯 난리법석이다.
이후 남편은 틈만 나면 '사건의 지평선'얘기해 줄까? 하며 쓰윽 옆으로 다가왔지만
끝내 나는 그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남편의 생일을 앞두고 어떤 음식을 마련할까 고민을 하다가 몇 달 전쯤 불쑥 LA갈비가 먹고 싶다던 그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진짜 맛있게 재워서 구워줘야지! 아름다운 마음을 먹었다. 신고배와 무, 사과와 양파를 믹서에 갈아 면포에 받치니 뽀얀 즙이 나온다. 거기에 간장 설탕 맛술을 넣고 핏물을 뺀 LA갈비를 담갔다. LA갈비를 재울 때 핵심은 양념에 건더기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양념이 타지 않고 깔끔하게 구워지는 것이다! 오후에 대학 동아리 모임 약속이 있는 큰 애를 위해 생일 파티는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점심까지 쭉 진행하기로 했다. 지글지글 팬 위에서 양념이 잘 밴 LA갈비가 구워지자 고소한 기름내가 퍼졌다. 다 같이 식탁에 모여 먼저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까지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큰애가 갑자기...
"아빠! '사건의 지평선' 틀어줄까?"
그 순간 남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그는 즉답을 날렸다.
"좋지!"
윤하의 목소리가 생일 파티 현장에 울려 퍼졌다. 신나는 리듬과 밝은 멜로디에 생일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편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아빠가 사건의 지평선 얘기 해줄까?"
"......"
"... 그래! 오늘 아빠 생일날인데, 듣자! 끝까지 참고 듣자!"
그렇게 남편의 설명이 시작됐다.
살짝 지루했던 블랙홀에 대한 설명 그리고 영화 인터스텔라까지 넘나들자 나와 아이들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오늘은 아주 특별한 그의 생일이 아닌가!
몇 번의 고비를 넘겼지만 다행히 우리는 그의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고, 결국 결론에 이르렀다.
중력이 너무 강해 확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 그 경계선, 이벤트 호라이즌이 바로
사건의 지평선이다. 무엇이든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면 강력한 중력에 의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면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지만 일단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너무 괴로워하거나
연연하지 말고 그 사랑의 기억을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깔끔하게 보내버리자는 이별 찬양곡이었다.
그렇다고 이 노래를 단순하게 안전 이별 권장 노래로만 해석하면 아깝다. 더 깊은 의미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아름답고 문학적인 가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은 '사건의 지평선', 즉 이벤트 호라이즌이라는 우주 과학의 개념을 노래에 담았다는 것에
아주 큰 점수를 준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으며 떠올렸을 것이다.
블랙홀과 중력, 이벤트 호라이즌, 인터스텔라... 이 어려운 개념을 절대 이해 못 할
문과 중심 뇌를 가진 아내와 두 딸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 순간을!
그리고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설명을 듣는 두 딸의 태도와 나의 리액션까지 모두 흡족했던지
그의 얼굴이 밝다. 아주 행복해 보인다!
뭐야! 내가 힘들게 양념한 LA갈비도 몇 점 안 먹고...
LA갈비보다 '사건의 지평선'설명에 더 진심인가?
"그동안 이거 설명하고 싶은 거 어떻게 참았어?
듣고 보니 재밌네! 윤하 진짜 대단한데, 멋지다! 노래도 좋고!"
"아빠! 노래 가사 진짜 맘에 드네. 이별은 상큼하게 해야지!"
"아빠 이 노래 짱 좋아!"
"그래? 그럼 이 노래도 들어볼래? 제목이 '오르트구름' 이것도 윤하 노랜데..."
"뭐? 요구르트 구름?"
"아니 아니 '오르트 구름' "
"오르트 구름? 오르트 구름이 뭔데??"
"오르트 구름이 뭐냐면 태양계 알지?"
....
참자!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