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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Nov 25. 2022

마초가 당신 남편을 찾아올 때
김창옥을 던져!

[매불쇼] VS [김창옥 TV]  

 아빠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둘째 아이는 바빠진다.

뭘 하고 있든 강아지처럼 달려가 중문을 잡고 아빠가 들어오지 못하게 대치하며 장난을 친다.

퇴근 시간은 늘 비슷하지만 좀 더 지친 날에는 이런 장난조차 받아줄 힘이 없어 

남편은 중문 밖에 서서 한숨을 쉰다.

그러다 어떤 날엔 열리지 않는 중문 앞에 서서 착한 아빠 판타지에 몰입한다.


"아유 오케이? 벋 알러뷰!"


저 아련하고 촉촉한 눈빛 뭐지? 느끼한 미소와 얼토당토 한 알러뷰 타령.


"김창옥 들으면서 왔나 봐?"

"어... 어떻게 알았지?"

"김창옥 테라피 대단하네.. 눈빛 촉촉한 것 좀 봐. 엄마 보고 싶겠네?"


남편이 빵 터진다.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갈 때도 종종 김창옥 특강을 듣는다.

김창옥 이분은 우리나라 남자들의 고질병인 낮은 공감능력과 마초 흠모병에 대해 아주 통달을 하신 분인

듯 보인다. 여자들에겐 당신의 남편이 이렇게 자라서 지금 이 지경이에요!라고 말하며

당신 말고 대부분의 여자들도 비슷하게 골치 아프니 '나만 억울해!'는 넣어두라며 위로를 한다.

남자들에겐 당신이 자라온 환경이 이래서 당신이 이 지경이니 제발 그렇게 살지 말고 아버지보다 업그레이드된 남편과 아빠가 되라며 격려하고 위로한다.

듣다 보면 뻔한 말인데도 본인이 일상 속에서 느끼고 깨달은 사소한 감정들을 질펀한 사투리에 얹어

어찌나 맛깔스럽게 전달을 하는지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웃다 보면 그래!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같이 듣는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눈빛이 아련하다. 아내도 알아주지 못한 자기 마음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해주고 이해까지 해주니 얼마나 좋아!

딱딱하게 굳었던 그의 마음이 치즈가 녹듯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렇게 좋아?"

"좋아."  



드디어 월드컵 첫 경기가 열리는 날, 아침부터  붉은 악마와 응원 열기로 TV가 부산스러웠다.

사실 난 축구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집 두 딸도 관심이 없다. 아침을 먹다가 우리 큰애가 한 말.


"이번 올림픽은 그래도 수능 끝나고 열리네."

"올림픽이 아니라 월드컵이야"

"아..."


심지어, 남편이 월드컵에 대해 또 아는 척 설명을 하며 첫 경기는 항상 개최국이 출전을 한다고 하자.

우리 큰애가 웬일로 추가 질문을 던진다.


"그래? 모든 종목에 다 카타르가 제일 먼저 출전해?"

"모든 종목? 월드컵은 축구만 해."

"아..."


우리 집에서 월드컵에 열광하는 인간이 남편 하나뿐이라는 게 그에겐 불행인 건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 드디어 우리나라가 출전하는 월드컵 경기가 시작되기 세 시간 전, 이른 저녁을 먹은 터라 남편에게 코스트코에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지난 주말에 사 온 깜빠뉴가 생각보다 맛있어 금방 다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둘째 아이도 환호하며 장발장의 빵 깜빠뉴를 사 오라고 방방 뛰니 남편도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한다. 시계를 흘끔 보며 눈빛이 흔들리는 걸 감지하긴 했지만 모른 척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을 집에 두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시동을 걸자마자 바로 시작된 오디오는


김창옥이 아니라 매불쇼였다!


어쩐지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게 눈빛이 들떠있다 했더니 이 인간이 김창옥이 아닌 매불쇼를 들으며 

집으로 온 것이다. 당일 오후 2시 방송된 걸 퇴근길에 2배속으로 들으며 월드컵 축제에

몰입하기 위한 워밍업을 한 모양이다. 그. 러. 나 매불쇼는 우리 큰 애가 시청 금지령을 내린 불온한(?) 유튜브 채널이다. 절대 시청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맹세가 몇 번이었나! 

나는 방송국에서 오래 일하며 남자들이 나누는 수위 높은 농담 같은 것에 통달해 내성이 있는 편이라 

남편과 함께 낄낄 웃기도 한다. 하지만 젠더 관련 문제에 민감하고 높은 의식을 갖고 있는 딸에게 매불쇼는

분명 불편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우연히 함께 듣게 된 방송 중 발생한 몇 건의 민감한 사안으로 고초(?)를 겪은 남편은 결국 딸과 약속했다. 다시는 매불쇼를 듣지 않겠다고! 

하지만 월드컵 축구 열기로 타오른 흥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 건가? 월드컵 경기를 앞둔 오늘 딸과의 굳은 약속을 저버리고 그 불온한 매불쇼에 손을 댄 것이다. 남자들 여러 명이 모여 앉아 축구! 축구! 마초! 마초!

아주 난리가 났는데 뭔가 지켜야 할 선을 애매하게 넘나들며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이거 이거... 안 되겠네? 딸 주사 맞을 때가 됐나 봐?"

"쉿! 말하지 마... 오늘 월드컵이잖아"



코스트코에 도착해 카트를 끌고 매장에 들어가니 마침 베어파우 신발 행사가 진행 중이다.

4년쯤 신은 어그 모카신이 꽤 낡았길래 새것으로 사려고 보니 그새 가격이 올라 16만 몇천 원이라는 거다.

동네나 돌아다닐 때 신을 신발을 16만 원이나 주고 사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같아 그냥 돌아섰는데,

오늘 만난 베어파우 모카신은 49900원이란다. 저렴하기도 하지! (*12월 4일까지 행사임)

그런데 내 맘에 든 베이지색은 내 사이즈 7이 없어 7.5를 사야 했다. 7.5도 대충 맞는 거 같긴 한데 

혹시나 하고 블랙 7을 신어보니 아무래도 7.5보다는 7이 더 잘 맞는다. 근데 블랙을 신어보니 

베이지보다 더 실용적이고 괜찮을 것 같다. 그럼 블랙으로 7을 사면 되지만 왠지 내 마음을 흔든 

베이지색 모카신 발등에 얹어진 노르끄름한 털 뭉치가 동화처럼 깜찍해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이 우주에 베어파우 모카신과 나 둘만 존재하는 듯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소통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는데, 갑자기 들리는 남편의 한숨 소리.  


"하아... 짜증 나. 진짜. 그만하고 가자!"    


진심으로 짜증난 목소리. 누구라도 들었다면 한 번쯤 돌아봤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다. 남편의 이런 반응. 분명 오는 길에 차에서 들은 매불쇼 때문이다. 

축구와 마초에 오염된 남편은 눈빛까지 썩어있었다. 

바로 지금이 김창옥 테라피가 필요한 순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남편의 귀에 에어 팟을 꽂아 김창옥을 틀어줄 수는 없으니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며 남편을 조용히 제압했다. 이후 난 그의 말에 무응답으로 대응하며 겁을 주었고 자신이 마초에 빠져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걸 깨달은 남편은 곧 정신을 차리고 쇼핑에 협조했다. 집을 향해 출발한 시간은 9시 21분. 

조금 더 달리니 41분이다. 우리 차를 추월하며 달려가는 과속 차량을 보니 분명 10시에 시작하는 월드컵 경기를 보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축구가 뭐길래!

  



코스트코에서 사 가지고 온 물건을 정리하고 돌아보니 남편이 혼자 소파에 앉아 월드컵 축구를 보고 있다.

그의 옆엔 치킨도 맥주도 없다. 심지어 함께 소리 지를 누군가도 없다. 그런데도 혼자 환호했다 짜증 냈다

아쉬워했다 난리가 났다. 23년의 결혼 생활 중 남편이 축구하는 걸 본 건 딱 한 번뿐인데,

아주 축구 감독 나셨다. 축구! 축구! 마초! 마초! 축구를 좋아하는 내가 진짜 남자다!!! 그런 느낌이랄까?

문득 그의 옆에 함께 즐길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며 아까 코스트코에서 남편을 향해 쏜 레이저 눈빛이 미안해졌다.

그래 내가 한번 도와준다! 하는 심정으로 남편 옆에 앉아 응원이란 걸 하는데

잠시 후 손홍민 선수가 공을 뻥! 찼다. 나도 모르게 으아! 함성을 질렀는데

그 공은 골대를 빗나가고 말았다.


"아니 무슨 일이야? 손홍민이 공 차면 그냥 골인되는 거 아니야? 몇십억 받는 선수라며!"

"몇십억이 아니라 몇백억."

"아... 그래? 몇백억씩 벌면서 얼굴에 수술까지 했는데 경기에 왜 나와?"

"그게 월드컵이지, 스포츠 정신이지!"

"아..."


월드컵이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은 거 같은데, 큰일이다.

오래 잠잠했던 남편의 마초병이 월드컵 특수를 맞아 되살아나고 있다.


김창옥 테라피가 시급한 요즘이다.





*김창옥 강사님, 존칭 없이 이름을 막 불러 죄송합니다. 저희 부부는 강사님의 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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