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원 Jul 09. 2022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발견한 정치적 메타포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중년 아줌마의 아주 아주 개인적인 리뷰

*스포일러 있어요, 영화를 보신 분만 읽으시길!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나에게 숙제 같다. 

보긴 봐야겠는데, 살짝 보기 싫기도 하고 잘 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하지만 꼭 봐야 한다. 그의 눈이 어딜 보고 있는지, 그가 세상에 뭘 말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나는 항상 그를 지켜보고 있다.


 몇 년 전 '아가씨'가 개봉됐을 때, 부리나케 극장으로 달려갔다.  

구글 이미지 중 하나

이미 불 꺼진 극장 안에 더듬더듬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영화는 시작됐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불도 켜지기 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잠깐 딴 세상을 다녀온 듯 머리가 멍하고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집에 와서도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화 속 강렬하고 조금은 불편한 이미지들이 잊히면서 비로소 영화의 메시지가 점점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래! 박찬욱 감독은 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인물이야!  


한동안 세상이 혐오와 차별로 엉망진창이 됐을 때도 난 그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영화 포스터


 처음 영화를 보고(난 이 영화를 총 세 번 봤다) 눈물이 쏟아졌다. 첫 느낌은 '구원의 영화'. 남편의 폭력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여성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구원의 영화로 다가왔다. 마치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예수님을 만난 듯했다. 고통 속에 살다가 끝내 살인자까지 된 그녀를 구원할 사람은 역시 박찬욱뿐이다! 그녀에게 휴대폰을 더 깊은 바다에 갖다 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법은, 세상은 그녀에게 살인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너무나 비극적인 그녀의 사연을 고려한다면 용서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만이라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무엇보다 그의 눈이 서발턴,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좋았다. 영화 '아가씨' 때도 그랬는데, 여전히 그는 고단한 여성을 바라본다. 불쌍히 여긴다!  


"남자 주인공이 송서래 그 불쌍한 여자를 따듯하고 품위 있게 지켜주는 게 너무 감동적이다."

"글쎄... 그 남자,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혼자 사는 여자 훔쳐보고 부인한테도 착한 척하면서 거짓말하고 

 송서래를 사랑하면서도 결국  발 빼잖아. 부인에게도, 송서래에게도 거짓말 한 나쁜 사람 아니야?"

 

폭풍 오열을 한 마음을 다스리며 상영관을 나오는데 같이 영화를 본 큰 아이가 반론을 제기한다. MZ세대인 딸은 지금 대학에서 국어국문과를 전공 중인데 현대, 문화, 비평 관련 수업을 듣고 소설과 영화 등 각종 콘텐츠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과제를 자주 제출한다. 그러니 당연히 귀 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난 이미 박해일의 수려한 외모와 구원의 이미지에 이미 깊이 몰입하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있을까? 그는 품위 있게 그녀의 마지막을 챙긴 사람이라고,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둘의 사랑은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말해주었다.    




 다음 날, 이번 엔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어쩌다 듣지 못하고 흘린 대사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파도치게 한 바로 그 장면들을 다시 보기 위해 기다리며 심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엔 내 눈이 송서래(탕웨이)를 따라다니게 된다. 

잠을 못 자 다 죽게 생긴 형사를 재워준다. 신발끈을 묶으라고 말해주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키스를 해주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반면 내가 구원자라 믿은 이 남자가 이번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큰 애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르는 거다. 


"글쎄... 그 남자,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어제 봤을 땐 분명 안 보였던 거 같은데, 뭔가 알쏭달쏭하게 거슬린다. 이 남자는 자신이 깨끗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직업적 소명의식(?)에 심취한 말일 수도 있고, 결혼반지를 낀 손가락이 보여주는 혼인에 대한 충성스러움을 어필하는 것일 거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책임을 다하고 바로 침대를 빠져나가 은밀히 송서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송서래의 메시지에 신바람이 나고, 급히 면도를 하며 송서래의 집으로 향한다. 과속을 한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형사를 오라 가라 합니까?"라는 진심이 아닌 아무 말을 떠벌린다. 그러면서 자신은 깨끗하단다. 심지어 원전은 완전 안전하다는 둥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원전을 찬양하는 어떤 기득권, 사회 지도층, 지식인들의 품위 있는 나불거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제는 내가 너무 박해일의 완벽한 외모와 중저음 목소리에 혹했었나? 그는 '방수'와 같은 단어를 한국어가 부족한 송서래에게 다정하게 알려주고, 치약을 짜주고, 화장실 위치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구글에서 검색한 영화 이미지

취조실에서 고급 초밥을 먹이고, 무엇보다 그녀의 지울 수 없는 과오를 덮어주었다. 나는 그 장면들을 사랑했다. 감동을 받고 끝내 눈물을 흘렸는데, 아닌가? 도대체 뭐지? 이 영화... 구원의 영화가 아닌가? 어쩌면 구원의 대상이 그녀가 아니라 바로 그 형사인가? 어쩌면 이 영화, 구원받지 못한 형사의 이야기인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번엔 큰 아이와 함께 또 극장으로 갔다. 개봉한 영화를 연속 세 번 극장에서 본 일이 있었나? 웃음이 나왔다. 이제 줄거리는 다 아는데도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어찌나 설레던지, 볼수록 설렘이 더 커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흰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많아진 노장 감독의 세련된 감각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이런 게 스탕달 증후군인가? 호흡곤란이 와 병원에 실려갈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난 이 영화에 아주 깊이 빠져든 게 분명했다. 익숙해진 영화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빠져드니 스크린 속 자욱한 안개가 걷히며 놀랍게도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이 찾아왔다. 내 생각엔 박찬욱 감독님은 이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라에게 손가락이나 물리고, 혼인한 아내를 이주임에게 뺏긴다. 결국 산소호흡기처럼 생긴 양압호흡기에 의존해 잠들 수밖에 없는 그의 비참한 결말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그녀를 찾기 위해 파도치는 해변을 뛰어다닌 모습이 처음엔 애절하고 안타까웠는데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희화된 건 아닐까? 


그러니까 어쩌면...


박해일    감독님, 제가 송서래를 찾아다니는 이 장면에서 제가 어떻게 헤매면 좋을까요? 마지막 장면이니 엄청 중요할 거 같은데요,

박찬욱    그건 멋지게 폼나게 뛸 필요는 없고요, 자기 자신은 깨끗하다며 늘 잘난 척을 했지만 정말 중요한 가치는 다 잃어버린 채 정신이 빠져서 마냥 헤매는... 그런 느낌으로 헤매세요. 


 이 남자는 잘난 척, 아는 척, 친절한 척, 품위 있는 척했지만 여전히 자기 신발끈도 제대로 묶지 못한다. 

사랑하는 그녀를 바로 아래(?) 두고도 찾지 못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지키려 한 게 무엇인지 모르고, 누굴 

사랑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 바보 같은 남자는 파도치는 해변에서 송서래를 향한 자신의 고백(?)이 

담긴 음성 파일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된다.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였는 지를.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졌다. 사라진 그녀를 찾기 위해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끝내 넘어지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바보 같은가 말이다. 그는 송서래에게 흔들리면서도 그녀를 의심했다. 결국 불신했다. 오히려 혼인관계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를 배신한 건 송서래가 아니라 그가 돌처럼 단단하다고 믿은 혼인관계였다. 그가 믿은 그 돌덩이는 아주 작은 오해만으로도 폭삭 내려앉을 솜사탕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영화, 사랑 이야기 맞아? 


박찬욱 감독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거지? 지겨운 결혼 생활을 지속하는 거 보다는 새로운 사랑에 마음을 열라는 메시지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뭐지? 그러면서 문득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설정 두 가지가 떠올랐다. 여자는 독립군의 후손이다. 그리고 남자는... 해군 출신. 사랑 이야기였다면 굳이 송서래가 독립군의 후손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남자는 원전은 완전 안전하고, 안락사를 살인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깨끗하다고 말하는 기득권인 반면 여자는 나라에 조상의 산을 빼앗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다. 

이거 혹시 정치적 메타포?    

 



해변에서 대치하듯 마주 선 이 남자와 여자. 

우연인지 의도인지, 내 눈에 여자는 스크린 왼쪽, 남자는 스크린 오른쪽 끝에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할머니에게 안락한 죽음을 드리는 게 나쁜가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한 인간을 마침내 원하는 방식대로 죽게 한 게 그렇게 나쁜가요? 

이 질문은 '법'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질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전작 '친절한 금자 씨'에서 이미 사적 복수에 대한 담론을 우리에게 제시한 바가 있다. 

그때 난 크게 공감했다. 영화에서라도 범죄 피해 가족들의 천추의 한을 풀어주고 싶은 감독의 마음이 

느껴졌다. 희생된 피해 아이의 문구용 가위가 악마의 목을 관통할 때, 그래 차라리 저게 낫겠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촘촘한 복수와 피해자를 향한 무한 배려(?)에 감동받고 나는 그의 팬이 되기로 결심했던 거다.  


이제 여자의 질문에 남자가 대답한다. 

당신의 알리바이가 돌처럼 단단해야 할 거라고. 남자가 말한 돌은 어쩌면 '명분'이 아닐까? 안락사에 대한 근거, 철학과 기타 어쩌고 저쩌구들이 돌처럼 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휴 답답하다. 그렇게 뻔한 말 말고, 적어도, 언젠가는, 당신을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다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너무 앞서 나가는 당신의 생각이 세상을 전복시킬 거 같아 두려워요. 하지만

 나에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나는 지금 당신에게 끌려요." 라고.




 오른쪽과 왼쪽은 지키려는 자와 뒤집으려는 자를 상징한다. 

지금 우리 세상은 오른쪽의 세상이다. 전쟁도 아닌 자연재해를 통해 원전이 망가져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당하는 걸 봤음에도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지금은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락사, 낙태, 여성, 소수자를 향한 배려보다 그들을 향한 냉소적인 시선이 더 멋지고 똑똑해 보인다. 

송서래는 호미산으로 남자를 데려와 돌아가신 엄마에게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꽤 믿음직한 남자를 데려왔어요" 


형사로서 직업의식이 강하고 사회 통념에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학벌과 배경이 좋은 품위 있고 똑똑한 남자. 전복시키려는 자가 아니라 지키는 남자, 어쩌면 보수의 남자다. 

그렇다면 지금 이 남자에게 필요한 건 뭘까? 차별과 혐오, 무지보다는 송서래와 같은 서발턴을 향한 따듯한 마음을 품는 구원의 아이콘이 되는 것 아닐까? 이걸 깨닫지 못한다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생의 파트너를 영원히 묻어버릴 수도 있다고, 그렇게 되면 바보처럼 안개 가득한 해변을 바보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자빠지고, 편안히 잠도 잘 수 없을 거라고 이 영화는 경고하는 거 같았다. 

머리가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차별과 혐오로 엉망진창이 됐을 때, 나는 그를 생각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뭔가 말해주길 바랬다. 어쩌면 그는 그때 이미...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흠흠) 




 이건 진짜 사적인 느낌인데, 영화를 보며 남편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남편은 다행히 송서래가 죽인 폭력 남편보다는 그 남자, 박해일에 가깝다. 그는 품위 있는 남자고, 나를 학대하지 않는다. 남편은 그 남자처럼 나에게 초밥 정식을 사주고 그보다 더 좋은 음식도 먹이고 싶어 한다. 가정 경제 측면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남편에게 가끔 염증 같은 걸 느낀다. 분명 이 남자에게 품위가 있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슬픔이나 공허한 마음에 깊이 공감을 못한다. 그런 그에게 답답함을 느낀다. 게다가 그가 가진 품위 때문에 더 해결이 안 되는 느낌이다. 그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게 힘들다. 이게 배부른 소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존재하는 걸 어떡하나?  


딱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지만 송서래는 연쇄살인자다.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그녀에게 살인은 어떤 재미가 아니라 문제 해결의 방식이다. (이건 딸의 분석이다!) 그녀의 첫 번째 살인은 자신의 엄마다. 엄마는 고통스럽다. 서래에게 자신을 죽이고, 조상의 산인 호미산을 찾아 떠나라고 말한다. 송서래는 엄마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엄마를 죽여드린다. 그리고 이후 기도수라는 남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독한 소유욕을 가진 폭력남편이다. 이제 어떡하나? 그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침내 남편이 원하는 방식으로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그녀의 두 번째 살인이다. 세 번째 살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것으로 가지고 있던 팬타닐으로 또 한 명의 할머니를 편안히 보내드린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강렬했던 마지막 살인은 자신을 구원한 품위 있는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폭력 남편'보다 '품위 있는 남자'가 송서래 인생 최대 난제였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품위 있는 남자가 여자 속을 터지게(?) 하면 여자는 자기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마가 아빠 때문에 힘든 이유가 있네. 품위 있는 남자가 아주 골치 아픈 거였어!ㅎㅎㅎㅎ"    


딸과 나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박해일 잘생김, 박찬욱 예수님에서 시작된 영화 이야기는 오른쪽, 왼쪽 정치판을 돌아 

우리 집 이야기로 끝이 났다. 박수를 쳤다.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메타포를 영상이라는 매체에 담을 수 있을까? 대서사시라는 왠지 모르게 올드한 말조차 '헤어질 결심' 옆에 붙으니 세련되게 어울린다.

앞으로 이 영화를 네 번 다섯 번 보게 된다면 나는 또 어떤 메타포를 발견하게 될까?

나의 기대는 멈추지 않을 거 같다.


"우리 '헤어질 결심' 한번 더 보러 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이전 04화 아내를 웃게 할 마법 같은 한 마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