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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징크스인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지인의 결혼식 전 날 우리 부부는 종종 싸운다.
돌이켜보면 사소한 문제였던 거 같기도 하다. 아니다!
사소했다 치더라도 내 기분이 상할만한 포인트는 확실했다.
저녁 식사 후 (웬일로) 설거지를 하던 남편,
주방 싱크대에 툭 걸쳐놓은 고무장갑이 걸리적거렸나? 이걸 왜 여기 걸어두냐며 짜증을 낸 것이다.
아니, 이 인간이 이번 주 내내 내가 차린 식탁에서 아침도 먹고, 저녁도 먹어놓고는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절은 못할 망정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 주방의 주인, 나인 거 몰라? 이 고무장갑을 여기 걸든 저기 걸든
그건 내 맘이야. 그냥 설거지하기 싫어서 짜증 낸 거야?
혹시 밖에서 짜증 나는 일 있었어? 그거 지금 나한테 푼 거야? 가장 가깝고, 편하고 쉬운 나. 한. 테!"
남편은 절대 그런 의도가 없었단다.
아무 일도 아닌데 왜 화를 내냐며 오히려 나한테 이상하다는 거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내 분노가 뜬금없었다고 인정해야 할까?
집에서 밥만 하다 보니 자존감이 낮아져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남편에 대해 잘 안다. 짜증 낸 것이 분명하다.
기분이 확 나빠지며 불현듯
이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는 주부이고, 아내이고, 엄마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경제적 가치를 막 창출하지는 않기에
솔직히 큰 역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난... 돌봄 노동을 하고 있는 주부다.
반면 그는 돈을 번다. 나는 그가 번 돈으로 살아간다.
내가 가정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도 중요하니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 종속된 느낌이 든다. 느낌이 그런 걸 어떡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는 내가 쓴 카드 사용 문자 같은 걸 확인하는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그냥 나 혼자 마음에 걸린다.
심지어 난... 불행하게도 돈 버는 일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주부라는 직업보다는 엔지니어나 CEO, 공무원, 디자이너, 마케터, 자영업 등등 그런 직업이
더 멋지고, 우월해 보인다. (대부분 그렇지 않나요?)
분노의 파도가 나를 덮쳐왔다.
상대적으로 덜 멋져 보이는 돌봄 노동에 지친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자세가
저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일 듯 타올랐다.
거친 설전이 오간 뒤 차가운 침묵이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착잡한 심정으로 꼭 참석해야 할 결혼식 청첩장을 열어보니, 무슨 일이야!
식장이 양재 쪽인 건 알고 있었는데 시작 시간이 무려 오전 11시, 현재 시간은 오전 9시. 그러니까
두 시간 뒤에 결혼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산에서 양재까지 주말 정체를 고려하면
두 시간이 뭐야? 그보다 오래 걸려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남편은 자동차 검사를 받고 온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
결혼식이 끝나기 전에 식장에 도착해 신랑신부 얼굴도 보고
방명록에 이름도 쓰고 축의금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일단 남편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를 한 뒤
아침을 안 먹은 남편을 위해 닭가슴살 샐러드를 밀폐용기에 담고,
급히 결혼식 하객으로서의 단장을 시작했다.
검정 니트 원피스에 올리브색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풀린 날씨를 고려해 코트 말고, 재킷을 걸쳤다. 진주 귀걸이를 양쪽 귀에 꽂고
예열된 고데기로 다리미질하듯 짧은 단발 머릿결을 정리했다.
웬일인지 마스크를 쓰고 있을 건데도 립스틱을 발랐다.
남편에겐 도시락을 먹으라고 하고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한입크기로 자른 닭가슴살을 포크로 찍어 먹는다.
차 안에서 먹다가 흘릴까 봐 깨끗한 마른행주까지 챙겨 와 그의 턱 밑에 깔아주었다.
양이 너무 많아 배가 부르다며 투정까지 부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이게 바로 내 돌봄 노동의 클라이맥스인가! 싶어 또 속이 부글부글...
차는 막히고, 결혼식 다 끝나고 도착하면 어쩌나 마음은 급해지고, 정신이 아득했는데
다행히 결혼식이 1부, 2부로 나뉘어 길게 진행되는 형식이라
30분 넘게 지각을 했지만 준비한 축의금도 제대로 전달하고 방명록에 이름도 남겼다.
식장 입구에서 혼주에게 인사는 못했지만 나름 선방이었다.
몇 걸음만 걸으면 아는 얼굴,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 인사와 스몰토크를 나눴다.
어제의 피 튀기는 부부싸움도 잊고 하하 호호 호호 하하
그렇지 뭐... 여기서 뚱하고 있어 봐야 사람들 눈에 저 집에 무슨 우환 있나?
어제 부부싸움했나? 그럴 일 밖에 더 있어?
이렇게 된 이상 쇼윈도 부부 저리 가라! 할 만큼 다정하게 팔짱을 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남편을 바라보며 어금니 꽉 깨물고
오래간만에 초승달 눈웃음을 날려주었다.
부부가 사는 게 이렇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또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 오후 강남부터 일산까지의 생각만 해도 답답할 운전이라면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낫다.
남편은 내가 운전대를 잡은 게 고마웠는지, 간만의 초승달 눈웃음에 긴장이 풀렸는지
전날 그 사건을 다시 언급하며 자신에게는 절대 나쁜 의도가 없었다며
별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벌컥 화를 내냐며 다시 내 화를 돋우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기분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을 텐데,
다시 한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그를 보니
답답하다 답답해!
여기서 다시 주부의 돌봄 노동이 얼마나 고단한지,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낮아진 나의 자존감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며 치열한 2차 설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락 말락 한다.
내 성질머리를 고려하면 분명 생겨야 하는데 왜 생길락, 말락 하는 건가?
왜 그런지 차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좋았다.
오랜만에 본 북적이는 강남 거리의 풍경도 낯설지 않고,
늘어선 빌딩과 힙한 디자인의 간판들도 다 재밌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분위기를 아우르는 재즈의 선율.
흘러나오는 음악은 Chet Baker의 'Do It the Hard Way'.
"내가 전에 '돈 많은 친구들'이라는 영화를 봤다고 했었지?"
"그랬나?"
"그 영화에 나온 장면인데 부부동반으로 자선파티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모든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해. "
"무슨 말?"
"뭘까? 이 말을 듣는 아내는 다 웃어, 아주 행복하게."
"... 사랑해?"
"땡! 틀렸어."
"... 모르겠는데..."
"당신이 제일 예.뻤.어.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고 따라 해. 네가 제일 예뻤어."
"아... 그래... 그래, 네가 제일 이뻤어. 킄킄킄"
고작 말뿐이고, 엎드려 절 받기에 불과한 데도 마법처럼 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초승달 눈웃음 다시 한번 발사!
"그러니까 그때 말이야, 당신이 제일 예뻤어."
정말 남편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던 걸까?
하긴 복부에 지방이 언덕처럼 솟은 그의 신체 조건을 고려할 때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는 그의 복부와 그 부근에 널어둔 고무장갑은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복부지방과 고무장갑의 불편한 만남이 불행히도 어떤 불협화음으로 이어진 거라고,
단지 그런 거라고 생각해야겠다.
...
아니 아니 아니 그럴 수는 없다!
...
그러고 보니 내일이 밸런타인데이네.
"이 글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재밌게, 낄낄대며 읽을 나의 남편에게 바칩니다!"
밸런타인 선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