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차차차', '돌 싱글즈'그리고 '각자의 본능대로'는 깍두기
미혼 남녀를 어딘가 가둬놓고 연애를 시키는 관찰 예능프로가 왜 이렇게 많은가!
제목을 전부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낮이고 밤이고 주말이고 평일이고 암튼 TV만 틀면
수많은 채널 중 어딘가에서는 방송 중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연애 경험이 없는 우리 큰 아이가 마침 그 프로를 보고 있는 내 옆으로 와 앉으며
한숨을 쉰다. 대학에서 찾으라던 그 옹성우의 사슴눈 남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냐며 나를 원망한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찾아올 그 운명의 순간을 예행연습하듯 TV 속 타인의 연애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자기가 마치 출연자 중 한 명인 듯 TV 속 그들의 연애에 자기 자신을 대입해본다.
의도와 다르게 파국에 이르는 커플을 보며 탄식한다. 아!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
엄마인 나도 몇 마디 말을 보태준다. 내가 연애에 도가 튼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7년 연애하고
결혼해 23년째 살고 있으니 나름 전문가가 아닌가! 저런 남자는 안된다! 이런 남자는 절대 안 된다!
의외로 저런 남자가 괜찮을 거 같다! 안 그러니? 공감이 안 되는 모양이다.
딸은 바로 독수리를 소환한다.
"엄마, 아빠 얼굴 보고 결혼했다며... 독수리한테 자기 눈을 찌르라고 했으면서
나한테 연애 훈수 두는 건 좀..."
"하긴, 그렇긴 해..."
남편도 아빠로서 나름 역할을 한다.
남자 출연자의 어떤 행동을 딸과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빵 터져 혼자 껄껄 웃는다. 어디가 웃음 포인트였던 거지?
공대생 남자와 무용과 여자의 출연자가 단체 미팅을 하는 프로였는데
눈에 띄게 아름다운 여자 출연자와 차 안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하게 된 남자 출연자가
갑자기 전에 했던 다른 여자 출연자와의 데이트에 대해 줄줄 읊어대는 것이다!
그러자 이 남자와의 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홍조를 띤 그녀의 얼굴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다!
딸과 나는 저게 무슨 일이냐며 도대체 왜 저러는 거냐고 한껏 몰입해 핏대까지 세웠다.
그러자 남편이 껄껄 웃으며 지금 저 남자 출연자는 정신이 없다고 한다.
그냥 물어본 질문에 대답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질문을 하긴 했다. 전에 했던 데이트 어땠냐는!
남자는 그 질문에 충실하게 대답을 할 뿐이지 절대 무례하거나 그녀가 싫은 건 아니라는 거다.
아니 싫지도 않으면서 왜 저러냐고 하자 그냥 남자들은 아름다운 여성 옆에 있으면
저렇게 된다나 뭐라나? 아! 그런 거야?
우리 남편이 누군가의 마음에 저렇게 세심하게 읽어내다니... 딴 것보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그 공대생들이 데이트하러 나갈 때마다 한결같이 입는 옷이 있는데
바로 카라티다! 역시나 공대생인 남편은 신혼 때부터 나에게 카라티를 그렇게 사 오라고 했다.
어쩌다 홈쇼핑에서 네 장, 다섯 장 카라티 판매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걸 한참 보고 앉아 있다!
나 왜 이러는 거니?
남편은 목이 짧은 체형인데 왜 그렇게 카라티를 입고 싶어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공대생 다섯 명이 한 공간에 모여 돌아가며 이런저런 카라티를 입고 나오니 뭔가 남편이 이해되는 지점이
생기는 거다. 무려 결혼 23년 만에 카라티를 향한 남편의 진심을 이해했다.
공대생에게 카라티는 곧 매너였다!
카라티 좋아했구나 우리 남편. 열심히 사다 줄게. 이미 많이 있지만...
이제 진짜 본론으로.
요즘 '돌싱글즈'와 '우리들의 차차차'를 보면서 정말 깨닫는 게 많다.
관찰 예능의 제작 노하우가 점점 향상이 돼 그런가 어떤 장면은 정말 진짜로 느껴진다!
오래전 일이지만 그래도 예능작가로 일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어떤 장면이 얼마나 진짜인지 정도는
느낌적으로 알아지는 게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모르겠다. TV 화면에 보이는 모습이 다 실시간,
진짜 같은 거다!
특히 아내의 말에 반응하는 남편들의 표정, 그리고 아내에게 말을 하는 방식이 너무 리얼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남편 그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듯 행동한다.
뭔가 흐름이 있는 대화가 진행되다가도 갑자기 딴소리를 하며 끊어버린다.
대답이 필요한 문장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냥 공감만 하면 되는 데도 그걸 못한다!
늘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는가? 멀쩡한 인간이 도대체 왜 저럴까?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오렌지를 까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에게 말을 건넨 적도 있다!
"나무들아, 아줌마 오렌지 까느라 힘들었다!" ( https://brunch.co.kr/@zlzllzlz/70 참고!)
물론 그날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그러나 심리적 거리는 태평양 건너편)
하지만 남편은 자기가 먹을 사과에 몰입해 있어 나와의 오렌지 대화에 대꾸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의 대화를 포기하고 차라리 나무와의 대화를 선택한 것이다!
남편들은 언어적으로 발달이 덜 된 종족인가?
왜 아내가 내뱉은 완성형 문장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청력이 부족한가?
생각해보니 청력이 부족하단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필요한 내용은 쏙쏙 골라 이해하지?
결혼 23년 동안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모습을 TV에서 봤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골고루 그런 면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솔직히 남편보다 더 심했다. (님아 그 길을 가지 마오!라고 외치고 싶었다.)
처음엔 저긴 또 왜 저래!! 하며 핏대를 세우기도 했는데, 계속 보니 웃음이 나온다.
남편이 왜 껄껄 웃는지 알 거 같다. 이게 거울효과라는 것인가?
추가로 내 마음에 '안심'이라는 작은 행복이 찾아온다! 사는 게 다 그렇지...
관찰 예능을 만드시며 수백? 어쩌면 수천 개의 영상을 확인하고 편집하시는 많은 분들과
출연자 섭외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많은 분들에게 심심한(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독수리를 소환해 소중한 내 눈을 찔러가며 내 선택을 후회했다.
남편의 괴이한(?) 행동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신을 향해 부르짖기도 했다.
드디어 신께서 내게 답을 주셨다. 부부 관찰 예능으로!
다수의 아내들이 너와 비슷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느니라!
그래도 일부 신의 축복 같은 어떤 DNA를 갖고 태어나
청력과 공감 리액션이 뛰어난 남자들도 어딘가에 존재는 할 것이다.
하지만 아주 극소수 일거야!! 그렇게 믿고 살자. 속이라도 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