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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Apr 05. 2021

나무들아,
아줌마 오렌지 까느라 힘들었다!

코스트코 20년 다닌 아줌마 남편이랑 대화 안돼 속 터진 이야기

초등학생과 대학생, 두 딸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대화가 끝이 없다. 어떤 날은 목이 다 아프다. 그냥 서로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떤 말이든 귀를 기울이니 당연히 그렇게 되는 걸 것이다. 쿵작, 핑퐁 어지간하면 박자가 맞춰 대화하는 것이 뭐 별 건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어렵다고 한다. 바로 우리 남편이다.     

  

“어? 오늘 비 오네.”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방에 있는 큰 창으로 비 오는 모습이 보이는 거다. 마침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로 걸어오는 남편에게 툭 한마디를 건넸다. 만약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도 나도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우리는 20년 차 부부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왠지 낭만적인 한 마디를 그에게 던졌다는 것에 나름 만족하며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게." "비 오니까 좋아?" "오랜만이네! 같이 빗소리 듣게 창문 열까?"       


이런 말들. 하지만 그는 꿀떡꿀떡 물 마시기 ASMR 신공을 펼치더니 아무 말 없이 주방을 떠났다. 순간 깨달았다! 이런 상황 처음이 아니다. 내가 지금 그를 돌려세워 나의 이 낭만적인 아침 인사에 아무 대꾸 없이 가버린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끝난 거 아니야? 대답이 필요한 말이었어?”      


희한하다. 참 희한해! (그냥 나 내일 이혼할까?) 어떻게 둘만 있는 공간에서 한 명이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던졌는데 아무 대답 없이 가버릴 수 있을까? 난 그의 이런 태도가 너무 싫다. 기분이 확 나빠진다. 그래도 아침부터 짜증을 내서 좋을 일도 아닌 거 같아 깊은 한숨 한번 내쉬며 봐주기로 했는데,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냉장고를 열더니, 코스트코 다녀왔다며 왜 바이오 요구르트가 없냐고 질문을 던진다. 깜박했다. 하지만 나도 복수하고 싶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다. 1초, 2초, 3초. 대꾸를 안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      

   

“아니, 내 말에 대꾸를 왜 안 해? 내가 비 오네! 했잖아.

 그럼 그러게 비 오네! 오랜만에 비 오니까 좋네! 왜 비 오니까 좋아? 

 뭐든 말할 수 있잖아. 하다못해 차 막히겠다, 그런 말도 안 하고 왜 그냥 가는데!!”     

“대답이 필요한 말이었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나 그냥 내일 이혼할까?



주말 아침 식탁에서는 이런저런 수다가 길어지기 마련이다. 

큰 아이가 꺼낸 젊은 꼰대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가 무르익자 나도 브런치 글 읽고 가끔 댓글을 달고 싶은데, 왠지 꼰대로 보일까 봐 걱정이 된다고 속마음을 꺼내 놓았다. 다 잘될 거라고 내가 해보니 다 잘됐다는 뉘앙스의 댓글을 달았다가 왠지 꼰대가 쓴 거 같아 지워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저 그 정도는 괜찮아! 뭐 그런 가족의 응원을 받고 싶었을 던 거 같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남편, 토스트를 먹고 있는 둘째 아이에게 불쑥 잔소리를 던지는 것이다.           

“그 칼로 자르면 톱니 없어 잘 안되니까 저 칼로 잘라서 먹어.”        

  

순간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이건 정말 내가 미치도록 싫어하는 거다. 아이들도 모두 내 눈치를 본다. 남편은 뒤늦게 눈치를 챘지만 자신이 지적한 그 칼에 대한 언급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한 번 강조하느라 내 화를 더 증폭시키고 말았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지금 그 칼 지적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

“나한테 하는 얘기였어? (큰애와 날 가리키며) 둘이 대화하는 거 아니었어?”    

      

[금쪽같은 내 새끼]의 오은영 박사님이 남자아이들은 귀가 잘 안 들릴 수 있다고 하시던데, 이게 혹시 그 문제인가? 오늘도 남편이 식탁에 앉아 사과를 먹고 있다. 나는 싱크대 앞에 서서 오렌지 껍질을 까고 있다. 바로 보이는 창 밖에 나무가 서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창을 바라보며 설거지를 하고, 야채도 쌀도 씻는다.          

“오렌지 까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네.”          


나도 모르게 구시렁거렸는데, 그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답이 없다. 돌아보니 

휴대폰을 들고 뭔가 검색을 하고 있다. 말해 뭐 해 분명 사과를 검색하고 있을 거다. 코스트코에서 파는 엔비 사과가 맛있다고 해 한동안 사다 줬는데, 그게 이제 나오지 않자 남편은 입에 맞는 사과를 찾겠다며 요즘 틈만 나면 사과 검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 차라리,      

        

“나무들아! 아줌마 오렌지 까느라 힘들었다!"     


큰애가 눈을 비비며 나와 또 무슨 일이냐고 한다. 엄마가 아빠 대신 나무한테 오렌지 까는 거 힘들다고 말했다고 하니 딸이 듣고 웃음이 빵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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