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트코 20년 다닌 아줌마, 공감능력제로남과 살아가는 이야기.
주부의 일상 속 장보기는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숙제 같다. 주말이 가까워 오면 또 뭘 해 먹어야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냉장고에 먹을 게 없으면 불안감이 밀려온다. 금요일 오전만 되면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이것저것 하다 보면 시간을 놓친다. 그러다 저녁 먹고 8시쯤 되면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저녁 먹은 거 운동도 할 겸 코스트코에 가자! 하면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선다. 큰 애가 놀린다.
"오~ 지원, 진경의 코스트코 데이트!"
차에 타면 나는 자연스럽게 입에 발동이 걸린다. 이번 주에 줌으로 학부모 총회도 했고, 담임 선생님과 전화 상담도 했고, 둘째 아이 병원도 다녀왔고, 큰 애 친구의 연애 담까지 들었으니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모른다.
"이번 담임선생님, 대박 너무 좋아! 행복한 1년이 되길 소망하신다고 해서..
나 아멘 할 뻔했잖아.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으시데,
진심... 너무 멋진 말 아니야?... 1년 전만 해도... 우연이 눈 수술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했는데. 코로나 겪고 나니 눈 문제는 솔직히 걱정도 안 돼, 안 그래?
아까 우연이 데리고 병원 가려고 나왔는데, 문 열자마자 완전 음식물 쓰레기 냄새나잖아.
앞집서 내놓은 재활용 거기 보니까 배달 음식 담겼던 플라스틱 통.. 딱 들어 있더라.
씻어서라도 내놓지 짜증 나 죽겠어."
뭔가 혼자 떠드는 느낌이 든다. 뭐지? 나 혼자 독백하고 있는 건가? 그의 손이 휴대폰 거치대 쪽을 맴돈다.
"얘기 끝났어?"
"왜?"
"팟캐스트 올라왔을 거 같은데.. 이제 들어도 돼?"
"아니, 내가 얘기를 했으면 뭔가 답을 해야지 앞 집 진짜 나쁘다 말 못 해?"
"그런 말을 뭐 하러 하냐."
"아니 (그냥 나 내일 이혼할까?) 들으세요. 팟캐스트."
스물아홉에 결혼해 20년 함께 살고 나니 중년이 됐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와의 대화보다 팟캐스트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할 순 없지 않은가! 게다가 가끔 속상한 일이 있어 하소연을 시작하면 남편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문제를 만난 듯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큰애를 부른다.
"엄마 좀 해결해라."
솔직히 내가 그에게 하소연을 한다고 해도 그는 내편을 들어줄 리 없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도 못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왜 저럴까?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저 "정말!" "대박!" "진짜?" 이런 말 몇 개를 머릿속에 넣고 아내가 원할 때 툭툭 하나씩 입 밖으로 꺼내기만 해도 일단 80점은 받는 건데, 왜 그걸 못할까? 그렇다고 내가 토로하는 시댁에 대한 불만에까지 "정말!" "대박!" "진짜?"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집 앞에 음식물 배달 용기를 씻지도 않고 내다 놓는 개념 상실한 앞집 정도는 함께 씹을 수 있지 않냐 말이다. 팟캐스트 진행자의 유머에 껄껄 웃는 남편의 옆모습을 보니 안타깝다. 코스트코에 도착하고 나니 그래도 혼자 온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 쌀 20kg도 살 수 있겠다. 바쁘게 이것저것 카트에 담다 보니 이 인간 어디 간 거야? 두리번거려도 보이질 않는 거다. 올라오는 짜증을 삼키며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하려는 순간 저 쪽에서 그가 뭘 들고 온다.
"어디 갔었어?"
"사워크림! 너 좋아하잖아. 그거 가지러 갔었지"
“뭐야. 이렇게 감동 주기야?”
돌아오는 길엔 그와 함께 팟캐스트를 들으며 낄낄 거려 준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게 참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