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원 Feb 24. 2021

이런 남자를 만나면
당장 결혼하세요!

넷플릭스에서 만난 차인표

미용실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년 꾸준히 머리를 맡긴 헤어디자이너가 있다. 

그냥 동네 아줌마인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날 대하는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잘되길 바라며 꾸준히 다녔다. 남편도 함께 머리를 맡기는데 몇 주 전 방문했다가 그녀가 매출 3000만 원을 달성했다며 갑자기 동료들과 함께 케이크 불을 끄며 축하를 받는 장면을 봤다고 한다. 사람 보는 눈이 다 비슷한가? 그녀의 진심을 본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닌 모양이다. 나보다는 남편이 미용실을 자주 가게 되는데 갈 때마다 지적을 하게 된다.      

"왜 그러고 가? 양복까진 아니어도 적당히 옷을 갖춰 입고 가야지 

그래도 미용실 가는데." 

     

그녀는 남편 머리를 자르며 분명 나를 떠올릴 텐데, 저렇게 하고 가는 건 싫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나름 '동안' 소리를 들었던 남편인데, 언제 저렇게 나이가 들었지? 중년이 되니 동안이라는 단어가 왠지 난감하다. 마치 적용 불가 판정을 받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동안이고 나발이고 그냥 승복해야 한다. 멋지게 나이가 들어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의 수필 '남자들에게'란 책이 있다. 남자의 매력에 대해 저자의 아주 개인적인 느낌과 패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낄낄댔다. 특히, 인문학적인 소양만 과하게 넘치는 남자들을 은근히 조롱하는 문장이 백미다. 지금 기억이 나는 건 어떤 배우가 좋지만, 그와 있는 시간을 상상해 보면 침대밖에 없다며 그런 그를 더 좋아할 수는 없다는 내용. 그분의 글은 솔직하고 재밌다. 어쨌든 남자를 그토록 꼼꼼히 관찰하며 외모는 물론 패션 센스와 내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적을 그렇게 재미나게, 인문학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 책을 읽은 후 남자를 보면 그 책을 떠올리며 시오노 나나미의 눈으로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이 남자, 매력이 있나?      

나의 헤어디자이너가 묻는다.      


"연애를 하고 있는데, 결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예요?" 

"우리 남편 자주 보면서...  나한테 그걸 물어봐요?" 

"호호호호"         


나는 내 남편이 얼마나 무신경한 사람인지, 패션에는 얼마나 둔감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게으른지 그녀에게 말해준다. 말하다 보니 우리 둘째 아이가 지은 아빠의 별명까지 말해주고 말았다. 그는 집에서 '천하의 귀차니스트 컥컥 목 막혀 고구마'라 불린다고. 그녀가 깔깔깔 웃는다. 어느 부분에서 공감이 된 거지?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뭔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좋은 남자를 선택하길 바란다.           


온 가족이 함께 영화 차인표를 봤다. 열한 살, 스물두 살, 두 딸과 중년의 남편 함께.

영화 전반부, 주인공 차인표가 뭐랄까 마초와 권위와 허세 그 중간 어디쯤에서 막 헤매는 장면이 이어지자 나와 딸들은 거실을 대굴대굴 구르며 깔깔 웃었다. 아! 너무 웃겨. 맞아 맞아. 남편도 무슨 얘기만 나오면 자기 혼자만 아는 양 잘난 척을 한다. 내가 주워들은 걸로 보태주려고 해도 너는 잘 모른다며 무조건 아니야!! 나만 제대로 안 다니까! 남편의 그 모습이 희화된 장면에서 우리는 대굴대굴 구르며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니, 표정이 뭐랄까? 이상하다. 찔리는 데가 있긴 있었나? 문득 남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에게도 남자다움이라는 갑옷을 입으라고 강요받았던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달라졌으니, 이제는 벗으라고 여기저기서 난리난리니 얼마나 골이 아플까? 어쨌든 이제 더 이상 남자다움이라는 가치에 매몰돼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고, 유연하고 유머스러운 남자가 되면 앞으로 너의 인생이 더 편안해지고 친구도 많아질 거라고 이 영화는 말해주었다. 맞다! 시오노 나나미 할머니가 그토록 강조한 덕목도 바로 유연함이 아니었던가!      

과거 방송일을 할 때, 차인표 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호기심천국(SBS)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초기에 잠깐 일했을 때다. 차인표 씨와 박철 씨가 함께 무순을 키우는 실험이었는데, 차인표 씨는 무순에게 사랑한다, 예쁘다, 말하면서 키우고 박철 씨는 무순에게 막 화를 내면서 키운 다음 나중에 그 결과를 비교하는 내용이었다. 그 시절 나는 예능국 작가라 솔직히 잘생긴 배우를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 유명한 배우 차인표를 대면하게 된 것이다. 기대감을 안고 그를 만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잘생겼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딴 세상 사람 느낌이랄까? 생활의 흔적은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예술인의 끼? 그런 것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너무나도 바르고 매끈하고 세련된 모습에서 전혀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라면 뭐라고 표현했을까? 선을 넘을 줄 모르는 남자와 연애하는 기분은 한마디로 꽝이다. 더 이상 그를 좋아하긴 힘들 거 같다? 하지만, 영화 '차인표'를 본 이후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어마어마한 잠재력과 함께 놀라운 매력을 발견했다.      


"차인표 씨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영화의 출연을 놓고 고심했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래도 결국 출연 결정했으니 당신은 천재입니다.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저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희화화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적극 가담한 점을 높이 삽니다. 당신은 알고 있군요, 지금 K남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어쩌면 일부 남자들은 이 영화를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왜 날 불편하게 하지? 왜 희화하지? 궁금할 것이다. 그 무겁고, 답답한 갑옷을 더 꽉 여미면서 말이다. 차인표는 그 갑옷을 벗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남자인지를 시간으로 증명했다. 그에게는 '도덕'이 있었다. 그가 하는 선행과 그의 가족이 보여주고 있는 선한 영향력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 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이제 말해야겠다. 나의 헤어디자이너에게.      


나는 남자의 매력이 도덕과 유연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십 대에는 물론 남자의 도덕에서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보여요 예전에는 그저 밍밍해 보였던 그 도덕이란 덕목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리고 본인을 희화화해도 껄껄 웃을 수 있는 높은 자존감과 그 어떤 것에도 과도하게 매몰되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다면, 당장 결혼하세요! 그런 남자는 정말 흔하지 않거든요! 




 


 

이전 07화 코스트코 연어 특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