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 극복기 #남의 결혼식 가서 눈물바람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취향을 말하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반백살에 딸을 둘 낳아 키우며 든든한 내장지방을 보유한 아줌마가 갑자기
"저 에그타르트를 좋아해요!"라고 말한다면... 요즘 아이들 말대로 "어쩔 TV?"
하지만 이 글을 시작하기 위해선 내가 에그타르트를 좋아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전 에그타르트를 좋아합니다. 바삭한 파이 속에 고소하고 달콤한 크림이 담겨 있어요,
한입 크게 베어 물면, 얼마나 맛있는지!
2011년 둘째를 임신했는데, 22주 만에 양수가 터지고 진통이 시작됐다.
공포에 질린 나는 걷지도, 서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제일병원 조산 집중 관리실에 누워 한 달을 버텼다.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불안했고, 너무너무 외로웠다.
간간히 지인의 병문안이 있었는데 그중 몇몇은 병원 근처 신세계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에 들러
에그타르트를 사 가지고 왔다. 뭐든 말하길 좋아하는 내가 한 번쯤 나의 취향에 대해 나불댄 걸
기억했던 모양이다. 남편은 매일 병원에 오진 않았지만 오는 날엔 항상 신계백화점 지하에 들러
마감 직전 세일하는 간식들과 함께 에그타르트를 사 가지고 왔다.
그 시절 나에게 중요한 일은 많이 먹고 뱃속의 아이의 몸무게를 늘리는 것.
병원에서 주는 밥도 꼼꼼히 다 먹고, 사이사이 떡과 두유, 이온음료, 주스, 생수, 각종 빵과
여러 가지 어쩌고 저쩌구들... 그리고 에그타르트를 종종 먹었다.
배는 이미 산처럼 솟아있었지만 먹고 또 먹고, 또 먹고 또또 먹으며
한 마리 암소처럼 그렇게 한 달을 누워 있었다. 성시경의 노래를 끝없이 반복해서 들었고,
미드 '닥터 하우스'를 보며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안한 마음을 지나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견딜 수 없는 어떤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나를 돕는 많은 간호사님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딱 한 명.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자주 하며 냉정하고 차가운 간호사가
있었다. 억울했다. 무시당하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소리쳤다.
"제가 빤스도 못 입고 여기 이렇게 누워있다고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엉엉엉"
그 와중에도 에그타르트는 맛있었다.
며칠 전 남편이 에그타르트 한 개를 건넨다. 회의 자리에서 자기 몫으로 받은 건데
에그타르트 홀릭인 아내가 생각났는지 그걸 안 먹고 가져온 것이다. 심지어 그 에그 타르트는 내가 예전에
먹었던 것보다 더 비싼 고급인 듯했다. 얼마나 맛있던지... 그 맛있는 걸 딱 한 개를 먹고 나니
한동안 잊고 있던 에그 타르트를 향한 열망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한 거다.
다음 날 저녁에도 에그타르트와 제일병원의 추억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입맛을 다시다 보니, 아니 내가 왜 이걸 아직까지 먹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원초적인 의문이 생겼다.
아이들 끼니 챙기고, 청소며 빨래며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진 일상 속에서
갑자기 에그타르트 하나 때문에 주부가 백화점 외출 감행하는 건 솔직히 부담이 있다.
나의 한탄이 이어지자 남편이 갑자기 지금 당장 백화점에 가서 에그타르트를 사 오자고 한다.
폐점까지 30분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아니... 가만있어봐. 이럴 거면 남편이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서
사 왔으면 될 일이 아닌가? 갑자기 뜬금포 레이저를 맞은 남편이 움찔하며 내일은 꼭 사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무슨 마음이었는지 급하게 X팡에서 판매하는 생지로 판매하는 에그타르트를 주문했다.
새벽에 도착하는 바로 그 새벽 배송 에그타르트. 이게 불행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았나!
다음 날 남편은 정말 맛있는 에그타르트를 사 가지고 왔는데 무려 한 개 삼천 원 몇백 원이나 하는 고가의
에그타르트였다. 달랑 네 개가 든 상자에서 한 개씩 꺼내 온 가족이 하나씩 먹고 나니 상자가 텅 비었고,
아쉬움을 넘어 허탈함에 이른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나는 새벽에 도착해 냉동실에 모셔둔
바로 그 X팡에서 산 그 에그타르트를 꺼냈다.
오븐에 에그타르트를 넣고 시간이 흐르자 버터 향이 집 안 가득 퍼졌고,
맛있는 에그타르트의 등장을 기다리는 가족의 기대와 열망도 한껏 부풀었다.
오븐이 열리고 구워진 에그타르트가 식탁에 놓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에그타르트를 손으로 집어
입 속으로 넣었다. 웬일인지 식탁엔 씹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볼뿐.
그렇다! 안타깝게도 그 에그타르트는 맛이... 없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라며 이 에그타르트를 주문한
남편을 배려해 의례적인 멘트를 주고받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그런데, 문득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솔직함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어떤 중년 남자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 거다. 바로 나의 남편. 나의 오이 고추 된장무침에게 짜다고 말한 그 남자,
나의 김치찌개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말하던 그 남자. 그래, 지금이야! 나에게도 기회가 왔어!
내 귀에 속삭이는 악마의 속삭임, 그 달콤한 유혹을 난 뿌리칠 수 없었다.
"진짜 별로다. 이 에그타르트. 세상에... 저걸 에그타르트라고...
크림인지 떡인지, 파이인지 종이인지... 저런 걸 뭐하러 주문했어!"
장난도 약간 섞인 공격이었는데, 남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기분이 꽤 많이 상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상한 남편 때문에 더 기분이 상했다.
악마의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자기는 나에게 그런 말을 쉽게 하면서 왜 내 그런 말에 기분이 상해? 무슨 일이야?
그의 논리는 이랬다. 자기가 맛없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나도 자기에게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단다. 본을 보여야 한다나? 이건 또 무슨 논리?
그러면서 자신이 어제부터 에그타르트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어필하며
상한 기분을 풀지 않고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한숨까지 푹 쉬는 것이다.
그래, 너의 나빠진 이 기분이 바로 그동안 내가 느껴온 나의 기분이다!
바로 이런 기분이 내가 느낀 바로 그 기분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주었다.
남편은 또 시작이라는 듯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로 지옥이 된 내 마음에 휘발유를 붓고
... 불을 질렀다. 아! 결혼 생활이 이렇게 힘들다. 거슬리는 남편의 말 몇 마디가 보드라운
내 마음 판에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듯 깊이 와서 박혔다. 뜨겁고 아팠다.
중년이 되면서 힘든 게 기분이 나빠지는 거다. 기분이 나빠지면 답이 없다.
앞도 뒤도 생각을 못하겠고, 그냥 나빠진 기분이 지옥을 향해 내달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놈의 에그타르트 때문에 23년 결혼 생활을 정리할 순 없지 않은가!
적당히 하다 멈춘 건 불행 중 다행이었는데 솔직히 어떤 천사의 속삭임 때문은 아니었고
생각해보니 어느 저녁 에그타르트 잘 먹다가 난데없이 엄마 아빠가 언쟁을 벌이니 아이들도 당황스러울 테고
무엇보다 나의 바닥난 체력을 생각하니 더 꽥꽥거려봐야 얻는 것도 없을 거 같아 전략적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주방으로 나오다 흠칫 놀랐다.
그 문제의 에그타르트 한 개가 남아 있다. 저것이 원흉이다.
네가 조금 더 충실한 에그타르트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니? 다시는 꼴도 보기 싫다 이 놈의 에그타르트!
밤 새 말라비틀어진 에그타르트를 쓰레기통에 확 던져버렸다.
리치(rich)하고도 따스한 나의 소중한 지인의 결혼식이 무려 호텔에서 열리는 날,
에그타르트에 대한 앙금은 풀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다.
한창 젊고 예쁜 신랑과 신부의 넘치는 사랑이 담긴 영상이 벽을 가득 채워 상영되고 있었다.
끝없이 사랑하겠다! 서로를 아껴주겠다! 주옥같은 자막들이 화면에 주르륵 나왔다가 사라지고
꽃향기와 함께 설렘이 폭발하는 음악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자
드디어 신랑 입장, 그리고 신부... 입장!
언제나 그랬듯 또 눈물이 났다. 이상하게 남의 결혼식에 가서 눈물바람을 잘한다.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거나
가족 간의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깊은 공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결혼식에서 흘린 눈물은 분명 슬픔과 함께 반성의 느낌이 있었다.
저 하얀 드레스를... 나도 입었고, 굳은 맹세를 하고, 같이 살고, 어느 여름밤을 함께 걷고,
새로운 생명이 찾아오고, 죽을 각오로 그 아이를 낳고,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울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깟 에그타르트가 뭐라고 내 마음은 그렇게 지옥이 된 걸까!
슬쩍 남편을 보니, 남편의 눈도 나처럼 촉촉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거 같다.
우리에겐 성인이 된 딸이 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어떤 미래를 상상했던 모양이다.
생각할수록 우리가 한 팀이 돼 할 일이 너무 많다. 에그타르트 정도의 사건으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그런 사이인 거다.
결혼식이 끝나고 길 건너 바로 옆 공중정원이 있다는 백화점에 들렀다.
이렇게 둘만의 시간이 가진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색하게 팔짱을 끼고
빌딩 사이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걸으니 그날의 앙금이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백화점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이런저런 트렌드를 눈에 익히고,
지하 식품 매장으로 가 집에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먹을 음식을 골랐다.
"너 보러 제일병원 갈 때 신세계 백화점 지하에서 이거 저거 샀던 거 생각난다."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잘 자라줘서 얼마나 다행이야. 정말 감사한 일이야."
"그렇지. 감사한 일이지..."
"저기... 에그타르트가 있네?"
"... "
"에그타르트... 우리 한번 극복해볼까?"
"그... 럴까?"
우리가 사 가지고 온 에그타르트를 보자 큰 아이가 빵 터진다.
"뭐야! 이거 에그타르트잖아!! 깔깔깔"
"엄마 아빠, 에그타르트에 대한 안 좋은 기억 힘들게 극복했으니까 그만 놀려!!!"
나는 예언자는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다.
우리 부부는 또 싸울 것이다. 꽃잎이 휘날리듯 행복한 순간도 단 몇 초 만에 위기로 치닫게 될 것이다.
결혼이 그렇다! 그럴 때 망했네 하며 지옥불로 내달리기보다
이번처럼 한 고비 넘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