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위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2PM준호, 이렇게 멋졌어?
정조의 생을 우려낸 드라마와 영화가 한 두 편은 아닌데,
내 기억에 남은 건 현빈의 해병대 제대 후 첫 사극 도전작 '역린'이다.
부친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의 의해 비참하게 죽어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정조는
이후 자신을 없애려는 정치세력들의 눈치 보랴, 할아버지 눈치 오랫동안 보랴, 하여간 살아남기 위해
불면의 밤을 보내며 책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근육 단련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감독의 상상력이 신박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현란한 등근육을 보며 그가 복무했었던
해병대의 헬스장, 옥상, 운동장이 떠올라 왠지 극에 몰입이 안됐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결국은 승복했다.
현빈의 촉촉한 눈동자에서 전해오는 서늘한 느낌이 정조 내면의 깊은 슬픔과 잘 어우러졌으니까.
나는 역린을 기점으로 조선왕조 500년, 그 수많은 왕 중 한 분인 정조를 곤룡포, 수염 할아버지가 아닌
'남자'로 인식한 것 같다. 이후로 오랫동안 내 머릿속 정조는 계속 현빈이었다. 그런데 또 만들어진다는
정조의 사랑 이야기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이 2PM 준호란다. 엥? 이 캐스팅, 실망입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너무 예쁜 드라마 제목에 혹 했던 마음조차 사그라들만큼.
오래전 작가 교육원에 등록하고 첫 수업을 들으러 갔는데,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로맨스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 캐스팅이 가장 중요하다고.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여성 시청자가 남자 주인공에게 마음을 뺏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 왠지 반발심이 올라왔다.
캐릭터도 중요하고, 연출 역량도 중요하고, 대사도 엄청 중요하지 않나?
하여간 타고난 비판 의식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에 저항했었는데,
이후 드라마를 볼 때마다 그때 선생님 말씀이 떠올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분이 집필하신 여러 편의 드라마 중 두 편의 시청률이 상당히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말이 나온 김에 그동안 내 마음을 뺏었던 남자 배우를 떠올려보면 일단 공유! 근데, '도깨비'는 아니다.
난 단연코 '용의자'다. 북한 특수 요원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자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시커먼 얼굴과 처연한 눈으로 조선족 사투리를 구사하며 화려한 도시를 헤매던 모습이 어찌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지...
그뿐인가, 역대급 자동차 추격씬에서 그가 보여준 현란한 후진 스킬 그리고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펼치던 화려한 액션, 정말 힘 빼고 하는 연기가 저것인가!
가끔 늦은 밤 영화 전문 채널에서 방송되는 '용의자'를 만나는데, 반가운 마음에 소파에 앉으면 결국 끝까지 보게 된다. 볼 때마다 감동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배우 공유의 인생작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정우성, 김재원, 조지 클루니... 아! 산드라 블록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프로포즈'의 라이언 레이놀즈! 영화 '프로포즈'는 몇 번을 봤는지 기억을 못 할 만큼 많이 봤지만 또 보고 싶다!
이성에 대한 왠지 모를 호기심도 생기기 시작한 우리 열두 살 둘째 아이와 보면 딱 좋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라이언 레이놀즈나 공유가 정조를 연기해야, 그 캐스팅 찬성이요! 그럴 거라는 건 아니다.
그래도 2PM 준호는 좀 아니지 않나? 했는데, 뭐지? 내 판단은 성급했다. 틀렸다.
왜 내 마음 흔들리지?
드라마 한 편을 쭉 다 본 것도 아니고 어쩌다 우연히 본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덕임과 정조가 서고에서 책을 찾는 장면인데,
덕임이 높은 곳에 놓인 책을 꺼내려고 하다가 정조 쪽으로 넘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정조 품에 안기고 뭐 찌릿 눈빛 오가고, 마음 통하고 어쩌고 저쩌고 알콩 달콩 그럴 줄
알았는데, 정조가 덕임을 무심하게 툭, 제 위치로 갖다 놓고 쓰윽 지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이 그렇게 웃겼다! 뭐야? 내 예상을 깬 유머 코드,
이 드라마 왠지 힙할 거 같은 느낌! 이 남자 주인공, 매력 넘치는데?
그 순간 나는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기로 마음 먹었던 거 같다.
이래서 배우는 좋은 작가와 연출가를 만나야 하는 모양이다. 뻔하게 넘어지는 여주인공을 품에 안고
느끼한 표정이나 지었다면, 난 이 드라마에 호감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렇게 중요하다! 선생님 말씀이 진리다.
한 번 마음을 먹으니 이전에 못 본 1화부터 정주행을 시작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을 틀어놓고 설거지도 하고 밥도 짓고,
뭐 좀 달달한 분위기 좀 연출되나 싶다가도 덕임이의 볼을 꽉 쥐고 사라지는 정조의 모습에 낄낄 웃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는 수십 끼니의 밥을 차렸고,
드디어 '옷소매 붉은 끝동'의 최종 두 편이 연속으로 방영되는 역사적인 토요일 밤이 됐다.
남편은 1부 중반부에서 졸리다고 나가떨어지고, 열두 살 나의 둘째 딸이 초롱초롱 토끼눈이 되어 자기는
끝까지 엄마와 함께 보겠다고 열정이 폭발한다. 덕임과 정조의 첫날밤에 역대급 장면이 있다는 둥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낚시질이 난무했지만 K 드라마가 해봐야 키스신 정도 있을 테고,
그 정도 수위의 장면은 헛기침 좀 하면서 서로 눈 마주치고 낄낄 웃으면 되겠다 싶어 같이 보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여러 번 눈을 마주치고 깔깔 웃었다. 뭐야?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조는 키스의 왕이야?
자정을 지나 드라마가 끝났는데, 왠지 마음이 슬퍼졌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보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정조가 나오는 드라마의 결론은 대충
다 비슷했다. 가족사의 비극과 슬픔을 이겨내고 성군이 된 정조, 멋지다! 대단하다! 늘 이런 결말.
그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옷소매 붉은 끝동'은 달랐다. 새로웠다.
진짜 주인공은 정조가 아니라 궁녀 덕임이었다. 그녀가 매 회 달리고, 싸우고, 버티고, 머리를 쓴 것은
왕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던 것. 그녀는 왕보다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한 것이다. 이런 사극에서 늘 익숙하게 보아온 장면들은 언제나 궁녀는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뭐든 한다! 였는데,
그 고정관념을 부숴버린 새로운 접근과 결말이었다.
생각할수록 공감이 간다. 기껏해야 열몇 살 된 소녀들이 수염 풀풀 날리는 왕의 승은을 입는 게
뭐 그리 기대되는 일이었을까. 동무들과 굴러가는 낙엽을 보며 웃는 일이 더 즐거운 시절이 아닌가!
덕임은 총명했기에 왕의 승은을 입고 매일 비단 보료에 앉은 채 계속 기다리는 삶이 얼마나 비극인지
알았고 그런 뻔한 후궁의 삶보다는 책임을 다하고 보람을 느끼는 궁녀로서의 삶이
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덕임은 끝내 왕을 향해 말한다. 나를 놓아달라고!
어지간하면 왕이 그렇게 좋다는데 그 마음 받아줄 만도 한데, 한사코 왕의 사랑을 거절하는 그녀를
나는 '밀당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저렇게 밀당을 해야 남자가 애가 탈 텐데 나는 저런 걸 못했네! 하며 한숨을 쉬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밀당의 여왕이 아니라 현실적인 비혼주의자였던 것이다!
도서관에 비치된 여성 잡지에서 본 내용인데,
작년 9월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성인 849명을 대상으로 '현대인의 가족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단다.
그 결과 미혼이라고 밝힌 응답자 중 30.1%가 '비혼주의'라고 대답했고, 비혼주의라고 답한 응답자 중
여성 비율이 68.7%로 남성보다 높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결혼 후 이어지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때문이라는 것.
물론 결혼의 본질은 사랑이지만, 살아보니 결국은 출산과 육아가 결혼의 전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 미혼의 여성들은 벌써 그걸 알고 비혼주의를 선택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난 결혼할 때... 정말 그걸 몰랐다.
덕임은 죽음을 앞두고 왕에게 말한다, 날 사랑한다면 다음 생애에서는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라고.
그 대사가 너무 아파 눈물이 났다. (하여간 드라마에 과몰입하면 이 지경이 된다!) 아이를 제대로 키워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병들어 죽게 된다면 나라도 그럴 거 같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며 오 년, 아니 십 년... 그때가 여자의 일생에 가장 고단한 시기가 아닌가.
엄마가 되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유. 그렇다고 고차원적인 자유도 아닌 정말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자유마저 빼앗긴 채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래고 '나'를 지우며 버텨온 시간들.
뭐 구구절절 쓰려면 끝도 없고 정말 뭐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유축기가 고장 나 열이 펄펄 나는
젖가슴을 부여잡고 새벽에 동네 산후조리원 벨을 누른 이야기를 써야 할까?
아니면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 남들도 다 하는 일인 거 같은데, 왜 저렇게 유난스럽지? 하는
그 표정에 대해 써야 할까!
"엄마는 요즘 우리 우연이 때문에 정말 행복해. 우연이가 최고야."
"진짜? 그럼... 내가 없었던 때에도 내가 최고였어?"
자기가 태어나기 전의 언니까지 질투를 하는 것인가? 둘째들의 질투심은 정말 엄청나다.
"그렇지... 그런 거 같아... 우연이가 없었을 때도 우연이가 최고였지. 흠흠."
"진짜?"
"그럼!"
드라마 내용 중 정조가 덕임의 유품을 보며 그리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죽으면, 엄마가 브런치에 쓴 글 언니랑 같이 보면서 웃어... 그럼 되겠다."
그냥 생각 없이 말했는데, 갑자기 조용해진 둘째 아이. 그러다 갑자기 내 품에 달려들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꼬옥 안아주는 거다.
"엄마... 죽으면 안 돼..."
갑자기 눈물이 폭발한 우리 모녀, 그렇게 한동안 부둥켜안고 가만히 있었다.
이거... 행복인가? 사랑의 기쁨인가? 마음속 가득 차오르는 그 따뜻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소중한 거라 그렇게 힘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드디어... 일본 정신과 의사가 쓴 중년의 위기 극복을 위한 에세이 책을 집어 들었다.
예전엔 그런 책을 보면 흥! 하며 보란 듯이 지나쳤던 나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나는 확실하게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다. 불쑥 자기혐오에 빠진다. 나는 쓰레기야!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그 책 마지막 문단에
이런 내용이 있다.
'중년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을 요약하자면, 언젠가 맞이할 노화, 질병, 죽음이라는 인생의 진실을 마주하고 그때까지 중요시했던 지위, 업적, 자산 등의 가치가 퇴색되면서 결코 가치를 잃지 않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이다. 진실, 사랑,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이정표를 마음속 어딘가에 두는 것은 인생 후반을 풍요롭게 보내는 데 소중한 힌트가 될 것이다.'
저자 시미즈 켄 [당신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됩니다] 중에서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부가 아니라 사랑이 넘치는 기억이라는 유언이 인터넷에 떠돈다. 누구는 스티브 잡스가 남긴 유언이라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그 내용에 공감 못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열두 살 아이 품이 그렇게 포근할 줄 몰랐다. 나의 죽음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저 아이를 보니,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인생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셈법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승복은 했는데 그래도 왠지 저항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눈물이 난다.
나는 딸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매 순간 오지랖이 폭발하는 나는 그 여성 비혼주의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드라마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한동안 '옷소매 붉은 끝동' 과몰입 상태로 종종 눈물을 흘리며
밥을 차릴 거 같다. 그러니까...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