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누구지? 하고 머뭇거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다음 멘트.
"여기 j일보..."
결혼하면서부터 j 신문을 구독하다가... 2년 전 즈음 고민 끝에 그 신문을 끊고,
좀 더 진보 성향의 k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j신문에 딸려오는 부록도 재밌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랫동안 'j'라는 주간지까지 함께 넣어줘
각종 문화 관련 뉴스,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한 어떤 교수의 연재 글 등
읽을거리가 풍성했지만 친일 뉘앙스의 사설과 칼럼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
거의 17년? 나름 장기 구독자였던 터라 어디 기록이 남아 있나?
종종 잊을 만하면 j일보 어쩌고 저쩌고 담당자라면서 전화를 걸어온다.
"사설, 칼럼 때문에... 도저히."
나의 성향은 파란색이다. 우리나라 40대 50대의 다수가 파란색을
지지한다고 하니, 나는 그냥 그 다수의 한 명일뿐이다.
물론 이렇게 sns에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이 내 운신의 폭을 좁힐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나는 유명인도 아니니 오늘만큼은 뭔가 이 복잡한 마음을 남겨두고 싶다.
소중한 절반의 구독자님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각오로...
선거의 결과가 확정되는 시점까지 TV 앞에서 숫자를 바라봤다.
그 미세한 차이는 금방 뒤바뀔 거 같기도 했다.
47.8... 나는 그 숫자가 49가 됐으면 했다. 하지만
결국 더 이상 그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딱 2%. 그 2%가 너무 아쉽고, 뼈 아팠다.
문득 지난주, k신문에 실린 대선 관련 칼럼들이 떠올랐는데,
한마디로 품위와 품격이 넘치는 글이었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찬양, 아니 도취.
이 혐오스러운 선거판에서 '이 사람만 아니면 된다'라는 심정으로 표를 던지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이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당신의 고귀한 한 표는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한 가치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친일 뉘앙스의 칼럼도 거슬리지만, 이건 또 뭔가?
보수언론이 혐오, 차별... 이런 거 다 별거 아니니 일단 정권교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칠 때
그나마 진보적인 언론마저 순수하게 가치를 추구하라고 품격 타령인 건가?
결국 그 2%는 사표가 되고 말았다. 바로 정의당이 가져간 득표율 2%.
손가락 절단 어쩌고를 외치던 어떤 후보는 품격을 던져버렸다.
단 며칠 동안 창피함을 참아내고, 결국 새로운 판에서 작은 목소리라도 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그의 선택이 차라리 나아 보인다.
우리는 언제까지 가치, 소신, 품격 타령하며 효용 없이 사라지는 표에 훈장을 달아줄 건가.
왜 품위유지는 항상 그녀의 몫인가 말이다.
계란이 바위를 칠 때, 계란 편이 되고 싶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좋아했다.
그런데 문득
2%의 그녀가 바위를 치는 계란으로 살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비판받지 않는
영웅이 되고 싶은 건 아닌지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알고 있다. 이건 위험한 생각이다.
그녀는 소수자의 편에 서서 품격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심지어 엘리트다.
어느 누가 감히 그녀를 비판할까?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 만큼 살짝 해볼 생각이다.
언제였나? 여자들의 우정을 다룬 TV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그녀를 봤다.
보는 내내 밤고구마 백 개를 꾸역꾸역 삼키는 기분이었다.
시댁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동서들과 전을 부치는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당의 대통령 후보라니...
향후 10년? 며느리들이 명절 음식에서 해방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구술 생애 작가 최현숙 님 정도는 돼야 극진보를 대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물론 그분이 대통령 선거에 나오실 리는 없겠지만, 느낌이 그렇단 얘기다.
빨강이든 파랑이든 각자의 이유로 자신의 색깔을 정하고 선거에서 이기길 바란다.
나는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않기에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딱 2% 때문이라는 게 안타깝다.
그녀도 그처럼 품격을 버리고 창피함을 한 번 무릅썼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오늘, 이 세상이 그녀가 사랑하는 노동자, 소수자, 약자에게
조금은 더 너그러운 곳이 될 수 있었을지도.
품위 있게 계란이 되어 멋지게 바위를 치는 그녀의 정치가 싫어진다.
누군가 소신과 가치에 투표한 그 품위유지비 2%가 자꾸 생각나 우울한 오후다.
*정치를 싫어하는 구독자님들 많으실 텐데... 저는 정치적인 사람이었네요. 이렇게 쓰고 나니
큰 숨이 뱃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고 5년 버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을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