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통해 받은 첫번째 제안.
십일만 팔천 칠백 십 원.
이 돈은 내가 1993년 sbs 3기 예능 작가 공채에 합격하고 받은 첫 주급이다.
이 돈을 받으며 4주간 등촌동 공개홀로 출퇴근을 하며 PD에게 교육을 받고,
각종 과제를 제출했다. 그러니까 이 돈은 일종의 '거마비'였던 거다.
지금은 사라진 SBS 여의도 사옥 지하에 있던 외환은행에 가서 계좌를 만들던 날,
그리고 처음으로 등촌동 공개홀 ATM기기에서 그 돈을 확인한 날까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입금된 십일만 팔천칠백십 원은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 금액의 크고 적음을 떠나
모든 것이 감사하고 설렜다. 나는 쓰는 것과 잡다한 것들 읽는 걸 좋아하는
국어국문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지만, 명문대생은 아니었다.
내 전공과 스펙이 취업에 취약하다는 걸 인지하고 걱정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방송국에서
작가로 오라고 하니 고마울 밖에.
그렇다고 거저 합격한 건 아니다. 뭘 하긴 했다.
신동엽 씨가 예전에 했던 콩트, '안녕하시렵니까?'와 비슷한 류의 콩트를 다섯 편 써서 제출했고
이후, 현장에서 제한된 시간에 프로그램 기획안 한편과 콩트 몇 편을 쓰는 시험도 봤다.
그리고 최종 면접을 거쳐 합격. 90년대 초반은 방송작가에 대한 환상이 널리 퍼져있던 시기라
경쟁률은 상당했다고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합격을 했다는 것도 충분히 감사했으니
돈 십일만 팔천칠백십 원은 아무 문제가 안됐다.
그러나 같이 합격한 서울대 의대생, 그리고 대기업 삼성을 다니던 나이가 좀 들어 보였던
분은 십일만 팔천칠백십 원에 실망을 했던 건지,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몇 번 교육에 참여하다 사라졌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후 더 기억에 남을 법한 금액이 입금된 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엔 십일만 팔천칠백십 원, 이 돈을 확인했을 때의 느낌이 남아 있다.
감사하고, 행복한 기억이다.
브런치를 통해 원고 청탁을 받은 건, 2월 초였다.
[저는 격월간 교육지 <민들레>를 만드는 OOO이라고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도움이 되는 책과 잡지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http://mindle.org)
작가님께 2022년 3월 중순 발행될 본 지 140호에 원고를 청탁드리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주제 : 팬데믹 시대, 아이들의 놀이
분량 : A4 3-4장 (원고료 200자 원고지 장당 6,000원)
마감 : 2022년 2월 21일 (월) 오전 10시
청탁을 수락해주신다면 더 자세한 청탁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반가운 답을 기다립니다.]
모쪼록 반가운 답을 기다린다는 마지막 문장이 좋았다.
항상 문을 두드리는 쪽은 나였던 거 같은데, 누군가 내 문을 두드리며
모쪼록 반가운 답을 기다린다니, 바닥난 내 자존감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2월 21까지 마감이라는 부분에서 울컥했다.
칼럼을 연재하던 잡지가 중단되자 내 인생에 마감이 사라졌다.
마음이 헛헛했다. 마감이 있을 땐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사라지고 나니 그리워진다.
잠깐이지만 나에게 마감이 생겼다는 것이 설렜다.
이 메일을 보낸 담당자는 내가 브런치에 올린
Z세대도 놀란 요즘 초딩 스케일 (brunch.co.kr)을 읽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팬데믹 시대에 달라진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기획으로 다룰 예정인데,
브런치에서 읽은 나의 글이 준비하고 있는 기획에 부합할 거 같다는 거다.
수락한다는 메일을 보내고, 마감보다 훨씬 빨리 글을 써 보냈다.
혹시 모른다. 후일을 도모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내가 원고를
엄청나게 빨리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남겨야 한다!
이후, 담당자의 의견을 들으며 몇 번의 수정을 거쳐 드디어 원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내 글이 실린 그 잡지가 집으로 배달됐다.
택배 상자를 여니 잡지 세 권과 고맙게도 책까지 담겨 있다.
그리고 목차에서 찾은 내 이름...
글 속에 나는 초등학생 딸에게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길을 열어주고
응원해주는 은근히 세련된 엄마로 보인다. 근데 왜 이렇게 찔리지, 불편하지?
솔직히 난 그렇게 나이스 한 엄마는 아닌 거 같은데...
요즘 많이 지친 느낌이다. 힘들다. 하루에 밥은 기본 다섯 번을 차리고 치운다.
놀고만 싶은 이 아이와 몇 장의 수학 문제집을 푸는 일은 진짜 머리가 터지는 일이다!
늦둥이 귀여워도 공부를 안 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시국에 학원을 보낼 수도 없고,
결국은 엄마인 내가 다 챙겨야 하는 것이다. (최근엔 브런치도 나에겐 사치였다.)
나는 좋은 엄마다. 나에겐 인내심이란 게 있다, 아니 있을 거다...!
오늘만큼은 화가 나도 꾹 참고, 다정하게 말하는 멋진 엄마가 되자!
나는 '민들레'라는 품격 있는 교육잡지에 글을 쓸 만큼의 멋진 엄마잖아
다짐해보지만 결국 한 번은 꽥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야 이 빵꾸똥꾸, 똑바로 하자!!!!!"
결국 이석증이 발현됐다. 지난밤 침대에 누워 뱃멀미를 했다. 울렁울렁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그래도 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잠깐이겠지만 몇 번 나이스 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있었다고 치자! 그 순간을 브런치에 남긴 덕분에 특별한 자아실현이 잠깐 이루어졌다.
그리고 확인한 나의 원고료가 십만 팔천 원. 나의 브런치 첫 수입이다!
십일만 팔천칠백십원 VS 십만팔천 원
나는 숫자에 까막눈이라 어떤 숫자든 느낌으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뜬금없이 삼백 번! 하면 그냥 많다의 의미고, 오천 팔 백번이요! 하면 그냥 더 많다의 의미다. 흠흠
어쨌든 왠지 십일만 팔천칠백십원과 십만팔천 원이 나에겐 똑.같.아 보인다. 그래서 재밌다.
똑같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십일만 팔천 칠백 십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한 것처럼
브런치 첫 수입, 십만 팔천 원도 그럴 거 같다. 그래서 마음이 설렌다.
그러니까 입금된 원고료가 오십오만 원이었으면
완전 다른 느낌이니 진짜 큰 일 날 뻔했다.
근데, 이게 무슨 논리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