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이동권 시위, 그렇게 불편하세요?
지난 몇 주 발가락이 골절된 아이를 휠체어에 태워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느낀 건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고작 2cm 정도 높이의 턱도 완전 으랏차차 힘을 줘야 넘어가고, 아예 휠체어를 뒤로 돌려서 거꾸로 넘어가야 그나마 수월했다. 아이의 등교와 남편 출근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어느 아침,
남편이 현관에서 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현관문의 그 2cm도 안 되는 낮은 턱을 넘어가려다 못 넘자 흠칫 놀란다.
"어? 뭐야? 이게 안되네? "
"남자 힘으로도 안되니 난 어떻겠어? 그것도 안되니까... 그러시나 봐. 지하철에서 데모하는 분들 마음 조금 알 것도 같아... "
11년 전 늦둥이 둘째를 낳고 매일매일이 갑갑해 죽겠는 데도 어디 갈 데가 없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도서관에 다니는 것도 지쳐 큰맘 먹고 버스를 타고, 전철도 타고, 용산 할머니 집에 가보고, 예전에 가깝게 지낸 지인의 집에도 가보고 그랬다. 지하철 환승을 하려면 한참을 가야 하고, 층이 다르면 엘리베이터도 타야 하는데, 종종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거나, 공사 중이거나 했다. 결국 나는 유모차를 손으로 번쩍 들고 그 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나? 그런 마음도 들고, 이상하게 유모차를 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그냥 집에서 애를 돌보면 되지, 왜 힘들게 돌아다녀요?" 하는 것 같았다.
육아 우울증이 깊던 시절이라 마음이 더 쪼그라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고생을 사서 하면서까지
유모차를 밀고 밖으로 나갔던 건... 자유를 향한 갈망 때문이었으리라.
"엄마도 아이 보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맘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도 없다면 어떻게 살아요?"
알래스카에 나의 오랜 지인이 살고 있다. 언니는 터널 비전이라는 눈 질환을 갖고 있는데
시아가 점점 좁아져 결국 보이지 않게 되는 질병이라고 알고 있다. 놀라운 건, 언니의 눈에 있는 장애를 나라가 인정한 이후, 이루어진 조치다. 언니는 법원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카페를 운영할 수 있게 됐고
언니에게 필요한 교육이 있다면 나라에서 그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날이면 나라에서 언니 대신 일할 사람을 카페로 보내준다는 것이다.
일할 사람을 보내준다고? "언니, 정말? 진짜?" 나는 여러 번 확인했다.
언니는 그렇다고 했다. 언니는 법원 직원들과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고, 커피를 내려 돈을 벌고,
더 먼 미래를 위한 준비로 상담 공부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고 알래스카가 완벽한 파라다이스라는 건 아니다. 그린 하우스라는 간판이 단 상점에서는 대마초를 합법적으로 팔고 있고, 코로나 봉쇄 조치로 반드시 필요한 상점만 문을 여는 상황 속에서도 대마초 상점이 약국이나 식료품점과 동급으로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어느 곳이나 크고 작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 목숨을 걸고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있는데
시간과 돈,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누군가를 '혐오'하는 게 마치 똑똑이의 스웨그 인양 당당한 게 싫다. 게다가 그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조치들은 꼭 그분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노인에게도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필요하지 않나? 지하철 엘리베이터 앞은 늘 북적인다.
적어도 우리는 노인은 될 것이다.
내가 그 시위 현장에 함께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휠체어 좀 몇 주 끌고 다니며 불편함 좀
느꼈다고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나 싶지만, 그래도 엄마의 브런치를 챙겨 읽는 나의 두 딸 보라고 쓴다. 늬 엄마가 맨날 밥타령, 꽥꽥 소리나 지르고, 마음 못 잡고 갈팡질팡, 마음속에 끈 하나 놓지 못해 동동 거리고 있지만 이런 생각도 하면서 산다! 혐오는 절대 배우면 안 되는 나쁜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