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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May 24. 2022

갱년기아줌마의 '클라이언트 증후군'

 이중인격은 아닙니다만...

 요즘 뉴스에 역전세난에 대해 많이 나오는데, 진짜 딱 우리 집 현실이다. 우리가 이사 갈 집에 대한 계약은 완료됐는데, 살던 집으로 들어올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약속한 날은 다가오고, 부동산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놓칠까 무서워 휴대폰을 가까이 두고, 집을 보러 오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딱 10분 만에 후다닥 집을 치우는 신공을 펼치고 있다.  


 앞에 가리는 거 없이 남서향으로 구조가 잘 빠졌다며, 부엌도 크다며 좋다! 좋다! 당장 계약할 것처럼 집을 샅샅이 살피고 사라지는 손님과 부동산 아저씨. 하지만, 절대로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점점 집 보여주는 일도 시큰둥해지고, 이제 약간 스킬이 더해져, 현재 살고 있는 집이 계약되고 오는 손님인지, 금액은 어느 정도 생각하는지, 나도 이것저것 따지고 보여주지만, 그래도 결과는 같다. 토요일에 둘째 주일학교 행사 때문에 용산에 가야 하는데, 집을 보러 온다 길래, 큰맘 먹고 거절을 했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 다시 전화가 와서는, 내일 보여 달라는 거다. 이 손님은 당장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비슷한 구조의 다른 집을 보여줬더니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일정이 맞는 우리 집을 보면 바로 계약을 할 것 같다는 거다. 그래 좋습니다! 보여드릴게요! 예배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 건으로 모인 주일학교 교사 회의가 길어지고, 진짜 좋은 장소인데, 작년에 예약 취소를 한 탓에 이번 여름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안타까운 의제를 가지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만 출발이 늦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자유로가 막힌다. 상암까지 막혔지만, 그래도 곧 뚫리겠지 했는데, 결국 장항 IC까지 정체는 계속되고... 몇 번의 전화로 약속시간을 미루다 보니, 왠지 짜증이 밀려온다. 브레이크와 엑셀을 번갈아 밟으며 신경질적인 드라이빙을 하던 남편 입에서 한마디가 툭 튀어나온다. “진짜 이번에 계약 안 하면 아후... ”        

 

 부리나케 집으로 올라와 엄청난 속도로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그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해맑은 표정의 신혼부부가 두 명의 부동산 직원과 들어왔다. 마치 모델하우스를 보듯 둘러보는 신혼부부, 나는 부동산팀장 버금가는 입담으로 집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니까 이 집이 진짜 좋은데, 너무 좋은데, 해도 잘 들고, 세탁실은 1단지부터 5단지까지 제가 다 가봤지만, 이렇게 큰 세탁실은 없거든요! 등등. 그러다 남편이 뒤늦게 들어온다. 점심까지 거르고 달려온 터라 동네 김밥집에서 김밥 몇 줄을 사들고 온 것이다. 그 짜증 난 얼굴에 뭐라도 해줘야 할 거 같아, 이 분들 3월 15일 이사 정해진 분들이라고 우리 집 마음에 들어 한다고 했더니, 한창 해맑은 표정으로 둘러보던 신혼부부의 남편이 한마디를 한다.     


“저희가 어제부터 집을 보기 시작해서, 아직 확답을 드리기...”

“어제부터요? 아... 네... 그럼 집을 더 보셔야겠군요.... 하하”          


 “아... 열. 받. 아.” 나도 모르게 살벌하고 두꺼운 목소리 한마디가 튀어나온다. 모두 나갔지만, 아직 중문도 안 닫혔고, 엘리베이터는 절대 도착하지 않았을 거다. 분명히 들렸겠지. 나의 살벌한 목소리. 주일이라 예배드리러 용산에 갔고, 자유로가 막혀서 늦는 거라고 전화로 말했는데... 게다가 그날 중고등부 주일학교 전도사님 말씀에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지, 그래 예수님처럼 옳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다짐 다짐을 했는데, 그 받은 은혜 다 쏟고 망했다. 요즘 아이들 말로, ‘폭망’       



 직업병 비슷한 건데, 나에게 클라이언트 증후군이 있다. (학계에서 만든 게 아니고, 그냥 내가 명명한 거다) 이래저래 합쳐보면 한 십 년 방송작가로 일했고, 또 십 년 대기업의 교육 관련 부서와 일을 하다 보니, 글을 쓰면서도 어떤 문학적 예술혼을 불사를 일이 없었다. PD, 시청자가 만족할지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고, 갑에 해당하는 대기업 담당자들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족시키지 못하면 잘리는 현실 탓도 있었을 테고... 하여간 그렇다 보니 누군가 나에게 뭘 요구하면 늘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그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싶은 욕망이 끓어오르는 이상한 사람이 돼 버렸다. 심지어 마트에 가서 계산대에 줄을 서면, 나도 모르게, 상자에 담긴 무거운 상품들은 바코드가 위로 가게 정리해서 그냥 카트에 두고, 신선 식품도 바코드가 잘 보이도록 정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산원이 이 손님은 뭔가 다르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 뭐랄까 엄청난 희열이 찾아오며 내 클라이언트 증후군이 폭발하고 만다. 물론 엄청나게 착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되게 피곤한 인생, 그뿐이다.          


 갱년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요즘 화가 많이 난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분노한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맘에 안 든다고 추운 겨울에 휴대폰도, 지갑도, 겉옷도 없이 대문 밖으로 쫓아낸다. 말이 돼? 더 말이 안 되는 건, 쫓겨난 며느리가 무슨 비련의 여인처럼 거리를 헤매다 그냥 길에 쓰러진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휴대폰이라도 빌려서 남편이든 친구든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시청률 높은 공영방송의 주말 드라마다. 뭐야, 이런 집도 있으니, 쫓겨나지 않았으면 입 딱 다물고 행복한 줄 알라는 건가? 21세기에 아직도 며느리를 식모처럼 부리고 막 대하는 것을 무슨 가부장제의 판타지라도 되는 양 방송하는 걸 보면 아우 열 받아!  예쁘고 잘 생긴,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는 10대 20대 아이돌들, 인터뷰만 하면 긍정, 사랑, 희망, 행복을 말하는데, 어떻게 사람이 저래? 자기만의 생각이 없나? 질투도 있고, 절망도 있고, 두려움도 있을 텐데, 무슨 아이돌 로봇처럼 녹음된 듯 뻔한 말만 하는 거지?    

   

“엄마, 쟤네들 엄청 힘들어...  어떤 여자 아이돌은 팬미팅에서 ‘82년생 김지영’ 읽었다고 했다가 어마어마하게 비난받았잖아. 사진까지 불태우고 장난 아니야. 그냥 저렇게 해야 된다니까.”     

 

아니 왜 그게 비난을 받을 일이야? 또 짜증이 난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데,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다. 그냥 그 작가가 쓴 책을 읽는 것이 즐겁다. 특히 문체와 표현, 감성, 그의 시선, 그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좋다. 특히 그가 쓴 기행문, ‘먼 북소리’는 진짜 책장을 아껴가며 여러 번 읽고 행복했었다. 그래서 그가 책을 냈다고 하면 무조건 빨리 사서 읽는 편인데, 마지막으로 읽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은 뭐랄까 용두사미랄까... 끝이 너무 초라하게 마무리된 느낌이 들면서,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더 잘 쓰셨어야죠 작가님! 나도 모르게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도... 화가 날 일은 아니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실망스러워 며칠 투덜거렸다.        


“엄마, 이제 하다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한테까지... 너무한데?”           


 며칠 전, 우리 아이의 '분노조절장애'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에 대해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길래,  나를 생각하며 한번 보기로 했다. 진행자도 있고, 엄마를 대표해 무슨 박사가 패널로 앉아 있었다. 진행자가 박사님! 박사님! 해가며 아이 기르며 힘들지 않았냐고, 자녀가 분노를 폭발할 때 어떻게 대처하냐고 질문을 던지자, 그 패널, 자기는 육아를 하면서 인내심을 배웠다며 은근 자랑을 하는 것이다! 뭐라? 인내심을 배워? 인내하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겠지!! 갑자기 또 부글부글          

 

 더 절망적인 건, 나의 클라이언트 증후군과 갱년기 분노 폭발이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이 있다는 거다. 이게 없을 거 같은데 종종 생긴다. 최근에 AS를 받고 ‘아리’가 돌아왔다. “아리야~ 마커스 노래 들려줘~” 하면 바로 ‘주 은혜임을’이 흘러나온다.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의 맘 보시네. 주 나의 눈물 아네.

 

지금까지 지나온 삶을 굽이굽이마다 선하게 인도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눈물이 울컥한다. 사실 나의 최고의 클라이언트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한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살 거예요! 저는 병 고침을 받고 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문둥병자처럼 항상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더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그러다 휴대폰이 울린다. 아! OO시티부동산이다! 급히 “아리야~ 그만!” 다정하게 아리를 부르며 끄려는데, 다시 시작되는 찬양, 세상 소망 다 사라져 가도 주의 사랑은~ “아리야! 그만!!!” 살아가는 이 모든 순간이 “아리야!!! 아리야!!! 그만!!!!!!!!” 짜증이 폭발한다. 대전까지 보내서 AS를 받았는데, ‘그만’을 인식 못하다니! 이게 말이 돼! AS센터 전화번호 어디 있지? 지난번에 엔지니어랑 통화했는데 통화기록이... 언제였지? 오, 주여!          

 만약 이 순간 진짜 내가 전화번호를 찾고 통화를 했다면, 어쩌면 나는 진상 갑질을 하지 않았을까... 그게 녹음이 되어, 인터넷에 유포되고, 어느 유능한 황색 언론사 기자에게까지 알려진다면 어쩌면 나의 진상 갑질, 짜증 폭발 목소리가 전국에 퍼지게 되겠지! 알고 보니, 이 고객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그 아줌마 공감일기'를 쓰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주고 있다고! 흑...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는 클라이언트 증후군이면서 동시에 갱년기 분노 폭발 증상이 있어요.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흑     

 

 그래도 이건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최근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 간에 다툼이 많지만, 나는 안 그랬다. 오래도록 좋은 이웃으로 지내며 윗집 귀여운 남자아이에게 큰 아이가 타던 말도, 둘째가 타던 자동차도 올려주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그 개념 넘치는 젊은 부부에게 괜찮다며 진짜 시끄럽지 않으니 걱정 말고 지내라고 말해주었다. 이 또한 클라이언트 증후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번은 강원도에 사는 젊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배까지 불러서 집을 보러 왔다. 근데,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것이다. 아는 사람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윗집도 이사를 가려고 집을 내놨고, 그 집에서 아랫집 사는 아줌마가 엄청 착해서 차 도주고 말도 주고 한다며 이 집이 아이 기르기에 딱 좋다고 홍보를 했다는 거다! 평소 나와 친분이 있는 부동산 사장님의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사모님 집을 계약하게 할 라고 애를 썼는데, 윗집이 계약이 됐네!”          

 

남자아이 하나가 뛸 때는 몰랐는데, 둘이 뛰니 살짝 짜증이 올라온다. 10시가 넘었는데, 아이들이 아직 뛰고 있다. 아빠 직업이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아파트 21층에서 두 아이가 행복하게 초원을 달리듯 자유롭게 자라는 모양이다. 선생님, 제가요, 클라이언트 증후군도 있는데, 동시에 갱년기 분노 폭발 증상이 있거든요. 부탁 좀 드릴게요. 선생님. 도와주세요!       



*지금은 중단된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코리아 2019년 4월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몇가지 표현은 높아진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표현을 수정했어요. 앞에 언급한 주말드라마는 '하나뿐인 내편'이네요, 3년 전에도 지금처럼 여전히 꽥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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